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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정孤山亭, 하늘과 땅이 감추어둔 푸른 절벽 아래 작은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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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절벽아래 지어진 고산정 전경]

“가을에 일동정사를 지었다. 바로 고산정이다.
치솟아 있는 절벽을 끼고 깊은 물웅덩이를 내려다보니,
수려하고 깊고 그윽하여 선성 명승 중의 하나이다.
선생은 항상 경전을 끼고 들어가 머물었는데,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 곳은 푸른 절벽이 치솟아 있고, 고산과 대치하고 있으며
가운데에는 징담澄潭이 있어서 작은 배를 갖추고 위 아래로 노닐며
흥취를 돋울 수 있으니, 낙동강의 명승 중 한 곳이다.”

이상은 『성재선생연보惺齋先生年譜』에 기록된 고산정에 대한 기록이다. 기록에 보이는 것처럼 고산정은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당시 선성[예안]의 명승지 가운데 한 곳인 가송협佳松峽에 지은 정자이다. ‘고산’은 강 건너 정자와 마주하고 있는 수려한 절벽을 낀 독산獨山의 이름이기도 하며, 금난수의 자호[고산주인孤山主人]이기도 하다.

[하늘과 땅이 감추었던 절경, 고산정의 새벽]

또한 ‘고산’의 의미는 중국 북송의 문인 소식蘇軾의 시 가운데 “외로운 산 외롭게 떨어져 있으니 누가 집을 짓고 살기를 바라겠는가? 도인이 도를 닦으니 산은 외롭지 않네.[孤山孤絶誰肯廬, 道人有道山不孤]”라고 한 데서 나온다. 한편 ‘청량산 아래 하늘에서 아끼고 땅에서 감추어둔 별천지 마을이 있고, 해와 달의 아름다움이 상존하는 정자가 있다’고 하여 고산정을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기도 했다.

[고산정 현판 | 소장: 한국국학진흥원, 기탁: 봉화금씨 관찰공파]

금난수는 원래 종택 아래에 ‘성재惺齋’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이후 어느 날 퇴계 이황의 예던길을 거닐면서 청량산 암벽 옆 울창한 소나무 숲과 마주보는 내병대內屛臺, 그리고 가송협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연출해내는 빼어난 경관에 매료되어 고산정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곳을 제2의 별서로 삼으며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유고산 시판 | 소장: 한국국학진흥원, 기탁: 봉화금씨 관찰공파 성재종택]

한 해의 가운데에 천지 만물이 모두 돌아오니
사계절이 좋은 흥취는 어긋남이 없구나
붉은 꽃이 다 떨어지면 푸른 녹음 우거지고
노란 낙엽 표표히 떨어진 뒤엔 흰 눈이 날리네
사암砂巖 절벽에 바람 일면 겹옷을 입고
긴 냇가에서 비를 만나면 도롱이를 걸치리
그 가운데 별도의 풍류가 남아 있으니
취한 채 찬바람 맞으며 밝은 달을 희롱하네

一歲中間六度歸
四時佳興得無違
紅花落盡靑林暗
黃葉飄餘白雪飛
砂峽乘風披裌服
長潭逢雨荷簑衣
箇中別有風流在
醉向寒波弄月輝

- 「고산에 노닐다[遊孤山]」, 금난수琴蘭秀

[소나무 그늘이 드리운 고산정 숲길]

이처럼 경관이 뛰어난 고산정은 퇴계 이황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의 발길을 이끌었으며, 특히 청량산을 유람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 안덕문이 남긴 『동유록』에는 고산정을 방문했던 일화가 실려 있다.

점심 때 금 선생의 고산정을 향해 출발하였다.
비가 온 뒤라 물이 불어 배가 없어서 건너가지 못하였다.
강기슭에 서글프게 앉아 있는데 상당히 학식이 있는 노인이 나를 위로하여 말하길,
“옛날에 퇴계 선생이 금 선생을 방문할 때 이곳에 이르러 물을 만나 정자에 오르지 못하고 바위 면에 칠언시를 지어 썼다.”라고 하였다.
눈을 가깝게 대보고 손으로 더듬어 보았으나 먹의 흔적만 있고 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처럼 퇴계 선생이 남겼던 시 가운데 ‘제고산절벽書孤山絶壁’은 고산정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건너편에서 금난수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제고산절벽 시판 | 소장: 한국국학진흥원, 기탁: 봉화금씨 관찰공파 성재종택]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라는 사람 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日洞主人琴氏子隔水呼問今在否耕夫揮手語不問帳望雲山獨坐久
- 『제고산절벽題孤山絶壁』, 이황李滉

[강 건너에서 바라본 해질녘의 고산정]

이처럼 학문과 교유, 공론의 장으로 활용되었던 만대루는 한 번 오르면 얼마간이고 내려오고 싶지 않을 만큼 누마루에 걸쳐진 풍경이 아름답다. 기둥과 기둥이 만들어 내는 일곱 폭의 화면에 낙동강의 푸른 물줄기와 백사장, 병산의 사계절이 파노라마처럼 연출되는데, 그에 맞닿은 파란하늘과 이따금씩 흐르는 흰 구름이 그 풍취를 더한다. 지금은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만대루에 오를 수는 없지만 뒤편 입교당에서 들리는 듯한 글 읽는 소리를 상상하며 자연이 주는 시원한 바람을 잠시 느끼다보면 그 옛날 유생들이 느꼈던 감상을 공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표지석 너머 보이는 고산정 전경]

이처럼 고산정은 수려한 자연경관 속에서 학문과 수양을 위한 공간이자, 스승 이황과 제자 금난수의 사제 간의 정이 깃든 추억의 장소이며, 당대의 선비들의 필수 여행지로 손꼽히는 명승지였다. 지금도 고산정 안에는 그 흔적들이 현판과 시판으로 만들어져 걸려 있으며, 그때의 경관 역시 지금까지 남아 감동을 전한다. 이제 곧 단풍으로 물드는 가을,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절벽과 어우러진 고산정과 함께 가송협을 따라 예던길을 거닐어 보며 가을산책을 만끽해 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