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봄날, 맑은 하늘과 따사로운 바람, 마른 나뭇가지에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노오란 산수유 꽃봉오리와 연두빛으로 물 들어가는 들판을 보며 새삼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음에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좋은 날들은 그저 주워진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희생을 아끼지 않은 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오늘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매년 3월이면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펼쳤던 3.1절을 기념한다.
<태극기가 걸려 있는 향산고택 입구>
“조선은 왜란, 호란을 겪으면서도 여태껏 살아남았어요.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그때마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내놓죠. 누가? 민초들이. 그들은 스스로 의병이라고 부르죠. 임진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을미년에 의병이 되죠. 을미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지난 2018년에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일본 귀족출신 군인이 역경 속에서도 끊임없는 의병 활동을 이어나가는 조선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던진 대사이다. 위의 말처럼 의병의 후손들은 선대의 정신을 이어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그 뜻을 이루게 된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안동의 향산고택 역시 의병활동에 이어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삼대에 걸쳐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향산고택 전경>

<무궁화가 핀 향산고택 사랑채 전경>
향산 이만도李晩燾(1842~1910)는 퇴계 이황의 11대손으로, 어릴 때부터 학문과 가학 계승에 대한 남다른 의지를 지녔다. 특히 1856년 생부 이휘준이 과거에 급제한 것을 보고 출사의 의지를 다졌는데, “만약 내가 벼슬을 하지 못한다면 이 손가락을 펴지 않으리라”라고 다짐하며 왼손 엄지손가락을 구부렸으며, 이후 10년 뒤 1866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에야 구부린 손가락을 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만도가 쓴 과거시험 답안지와 장원급제를 하며 받은 교지>
관직에 나아간 이만도는 여러 관직에 진출하면서 유학자로서의 신념과 충절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으며, 1895년 을미사변을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공포 소식이 전해지자 예안지역의 의병들을 모아 선성의진宣城義陣을 결성하였으나 고종의 명에 따라 자진 해산하게 되고 이후 예안과 봉화, 영양 일대를 누비며 국권회복의 의지를 다졌다.
1905년 을사늑약에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지탄하는 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1910년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식을 시작하여 24일 만에 순국하게 된다. 그의 제자 이강호가 기록한 『청구일기』에는 이만도가 단식을 하는 가운데 가족과 친지, 문인과 제자들을 만나면서 담론을 하거나 가르침을 남기는 모습이 담겨있으며, 순국하기 3일 전 일본경찰이 이만도의 자결이 조선사회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몰래 미음을 먹이고자 한 것과 이에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도 “나는 당당한 조선의 정이품 관리이거늘, 누가 감히 나를 설득하려하며, 누가 감히 나를 협박하려는가”라며 호통을 쳤다는 일화도 담겨있다.
<이만도가 단식으로 자정순국한 과정을 담은 『청구일기』, 소장:한국국학진흥원/기탁:진성이씨 향산고택>
이러한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그 후로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특히 1차 유림단에 합류하여 파리장서를 기획하고 김창숙과 함께 서명운동을 이끌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중국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병사하면서 거사가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그의 아들 이동흠李棟欽(1881~1967)과 이종흠李棕欽(1900∼1976)이 함께 이어나갔는데, 이동흠은 1918년 대한광복회 명의로 군자금을 모으다 발각되어 옥고를 치뤘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동생 이종흠과 함께 김창숙이 이끄는 2차 유림단에 합류하면서 또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적발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향산 이만도,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 이중업의 아들 이동흠과 이종흠 등 이들 3대는 의병활동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한 집안의 목숨을 바쳤다. 뿐만 아니라 이만도의 며느리이자, 이중업의 부인 김락金洛(1862~1929)은 1919년 57세의 나이로 예안면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고문으로 두 눈을 실명한 여성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기도 했지만, 향산 이만도 집안의 아픔의 흔적은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일제의 검열로 얼룩진 『향산문집(직제집)』, >
<일제가 훼손한 이만도 묘비>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일본 경찰은 이만도의 문집을 검열하며 임진왜란과 의병활동에 대한 기록을 삭제시키는 것을 넘어 1916년 백동서당에서 간행 중이었던 향산문집 목판을 불사르고, 이만도의 묘비를 깨트리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그 모습이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진다. 한편 예안면에는 향산 이만도를 추모하기 위해 그가 순국한 자리에 정인보의 비문과 김구가 쓴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를 세워 그의 넋을 위로하고 있으며, 도산면 토계리에 있던 향산 고택은 안동댐 건설로 인해 현재 위치인 안동시 안막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예안면에 위치한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와 비각>
3월에는 독립운동의 역사가 깃든 향산고택을 비롯하여 도산면과 예안면 일대의 관련 유적지를 함께 답사해보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오늘을 우리에게 남겨준 향산 이만도 3대의 희생을 추모해보는 의미 있는 여행을 계획해 보시길 권한다.
※참고자료: 구경아, 『문중이야기4- 진성이씨 향산고택』, 한국국학진흥원, 2020.
안동의 향산고택 역시 의병활동에 이어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삼대에 걸쳐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이야기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