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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를 아낀다. 애일당(愛日堂)!
 

   

 
지난 1월부터 낙동강을 따라 펼쳐져 있는 안동의 누정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스스로에 도취 되어 그만 누정에 대한 정의를 빠뜨려버렸다. 그만큼 낙동강을 따라 펼쳐져 있는 안동의 산수는 생각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다. 그저 그렇게 그 자리에 다소곳한 모습으로 자연 속에 동화되어 있는 누정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슴 벅차오름을 느낀다. 안동의 산수는 어떤 교향곡보다 잔잔한 울림이 있고 감동이 있으며 먼저 살다 간 우리 선조들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 있어 아름답다.

흔히 누정(樓亭)이란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룻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하고 벽이 없게 지은 집을 말하며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이름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누각과 정자를 비롯해서 당(堂), 대(臺), 헌(軒) 등을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누각은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높은 언덕이나 돌 또는 흙으로 쌓아 올린 죽담 위에 지은 것을 일컫고, 정자는 벽이 없이 탁 트인 건물로 누각보다 규모가 작고 학문과 저술 활동을 위해 소박하게 지은 경우가 많다. 누정은 보통 마루로만 되어 있으나 한두 칸 정도의 온돌방이 딸린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정자가 개인적인 수양 공간이라면, 누각은 공적인 집단수양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월영교와 월영정의 야경

 

안동지방 누정의 중요한 특징은 대부분의 정자가 방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정자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하며 휴식과 친목, 놀이와 모임을 위한 풍류 공간이어서 대개의 경우는 전망을 위해 벽체를 없애고 기둥만 있는 개방형이며 또 일시적으로 활용하고 돌아가는 비체류형 건물이다. 그러나 안동의 정자는 경북지방 산간오지에 있어 교통이 불편하므로 ‘함께 모여’ 잠시 동안 풍류를 즐기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이러한 지역적인 자연조건은 정자 건축에서도 안동은 비체류형이 아닌 체류형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특징은 퇴계 선생의 성리학에 영향을 크게 받아 처사적 인성 함양과 선현에 대한 추념의 기능이 정자에 크게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자연경관에 대한 풍류 공간, 성리학적 도덕 함양을 위한 수행 공간, 교유와 모임을 위한 사교 공간, 선조나 선현에 대한 추념 공간, 내방객을 맞이하는 접빈 공간(별당의 기능) 등으로 기능이 다양하게 분화되거나 혹은 그 몇 개의 기능을 공유하는 형태를 보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누정의 참 기능과 역할은 누정을 바라보는데 있지 않고 그곳에서 밖을 바라보는 경관에 있다. 누각과 정자는 거기에 올라 천천히 생각하고 보고 느낄 때만이 그 참 맛과 멋을 알 수 있다.

 

농암 이현보 선생의 유적지 분강촌 전경/종택, 서원, 정자 등이 이건 되어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인 애일당은 조선 중종 때 문신이며 학자인 농암 이현보 선생의 별당 건물이다. 1512년(중종 7) 선생의 나이 46세 때 94세의 부친과 92세의 숙부, 82세의 사정 김집 등을 중심으로 한 구로회를 만들고 늙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경로당을 지었다. 당호를 애일당이라 한 것은 아버지의 늙어 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1.5칸의 건물로 뒤쪽 열 양옆에 각각 1칸 온돌방을 두고 가운데 2칸에 마루를 깔고 앞 열 4칸은 툇마루로 꾸몄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농암 이현보 선생이 제자를 중국에 보내 중국 당대의 명필에게 글씨를 받아오게 하였다. 이에 제자는 반년 만에 중국에 도착하여 다시 그 명필을 찾기에 한 달을 헤매게 되었는데 어렵게 깊은 산중에서 그를 찾아 애일당 현판 글씨를 청하였다. 그 사람은 뭐 보잘것없는 사람의 글씨를 받으려고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느냐고 하면서 산에서 꺾어온 칡 줄기를 아무렇게나 쥐고 듬뿍 먹을 찍더니 단숨에 애일당 석자를 써서 내주었다. 좋은 붓에 잘 간 먹을 찍어 정성스레 써줄 것을 기대했던 제자는 내심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써 줄 수 없느냐고 조심스럽게 청했더니 명필은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 하더니 쓴 종이를 가볍게 두세 번 흔들었다. 그러자 세 글자가 꿈틀거리더니 세 마리의 하얀 학이 되어 날아가 버렸다. 결국 농암 선생의 제자는 그 명필의 글씨를 받아오지는 못하고 제자의 글씨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이 현판은 홍수에 떠내려간 것을 백 리 밖의 어떤 어부가 건져다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은 자가 비중(棐仲)이고, 호가 농암(聾巖)이다. 1498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춘추관기사 등을 거쳤으며, 1504년 38세 때 사간원정언으로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안동 안기역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복직하여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고, 동지중추부사로 퇴직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에도 선생은 늘 고향과 가까운 곳의 외직을 청해 연로하신 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했다. 선생이 애일당을 지은 것은 1512년의 일이다. 정자를 지었을 때 감회를 적은 시를 보면,

작은 고을 선성은 나의 고향일세
조상들이 남긴 공적이 한데 쌓여 흘러내리네
백발 부모님 모두 90이 넘었고
자손들은 구름처럼 많아 마루를 가득 채웠어라

양친이 연로하니 어찌 나라 일만을 꿈 꿀 건가
옛 사람은 오히려 임금 섬긴 날이 길었다고 하리라
누대의 가업은 평화로이 굽어 흐르는 물가에 있어라
새로 바위 한 곁에 경사스런 집 한 채를 지었어라

 

 농암의 이 시는 애일당이 전적으로 효성을 위해 지어진 공간임을 암시한다. 물론 유가의 정자가 효성만으로 그 의미가 한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효성은 놀이와 연결된다. 부모를 즐겁게 하기는 농암이 말하듯이 ‘양친을 모시고 동생들과 더불어 색동 옷 입고 술잔을 올려 기쁘게 해 드리는 것’으로 구체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의미를 담은 애일당이다.

  

애일당 앞에는 강각(江閣)이라 이름한 누각이 분강을 가슴으로 받아 안고 있다. 강각은 1544년, 애일당 남쪽 분강의 강가에 지은 집으로 이곳에서 농암은 퇴계를 비롯한 많은 명현과 교유하면서 ‘어부가’를 지었고, 이후 그의 어부가는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끼쳤고, 이한진의 ‘속어부사’, 이형상의 ‘창보사’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맥을 이어갔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가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서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의 마음을 표표(漂漂)하게 흔들어 놓았고, 물결에 휩쓸리어 떠도는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고 적고 있을 만큼 영향을 끼쳤으니, 어부가를 낳게 한 강각은 영남가단의 모태가 된 건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농암의 자연사랑은 지극했다. 퇴계는 농암이 지은 '어부가' 발문에서 "아! 선생을 바라보면 신선같아 진실로 강호의 진락(眞樂)을 얻었다"고 하면서 자신도 그런 선생의 진락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애일당과 강각 아래 분강의 기슭에는 ‘귀먹바위[聾巖]’가 있었고, 강 가운데는 ‘자리바위[簟席]’가 있었다. 농암은 퇴계와 이 바위에 앉아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풍경을 연출했다. 농암집과 퇴계집에 의하면, "이윽고 날이 저물어 달빛에 물빛은 흐릿한데, 분강 한 가운데 '자리바위'에 촛불을 켜니, 강물은 여기서 좌우로 나뉘어 흘렀다. 한 줄기는 내가 앉은 자리 곁으로 흐르고, 아래에 퇴계가 앉아 있었다. 내가 취하여 희극을 하는데, 술잔에 술을 부어 '조그만 뗏목'에 올려 흘려보내니 경호(퇴계의 자)가 아래에서 웃으면서 받아마시기를 서너 차례 했다. 주변의 무리들이 이 정경을 보고 부러워했다"고 적고 있다.

 

애일당 앞에는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 새긴 각자와 강각(江閣)이 하나의 영역으로 옮겨져 있다.
 

애일당과 강각을 나서자 낙천의 물결이 햇살을 받으며 반짝인다. 농암은 명예를 버림으로써 더 큰 명예를 얻었다. 그의 강호지락은 곧 인생의 행복이었고 그런 생애가 절세의 문학을 낳았다. 문학은 강호지미(江湖之美)로 나타났고 거기 인간지락(人間之樂)이 있었다. 퇴계는 농암이 거니는 경관은 진경(眞景)이며, 농암의 강호 유람은 진락(眞樂)이며, 농암은 진정 강호를 이해한 진은(眞隱)이라고 선생의 삶을 관조했을 것이다. 농암이 추구했던 강호지락의 낭만적 미의식과 퇴계의 경(敬) 철학의 학문적 사색이 그 깊이를 더해갔을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의 도(道), 풍류가 있었다.

 

굽어보면 천심녹수요, 돌아보니 만첩청산이라
열 길 티끌 세상에 얼마나 가렸는가
강호에 월백하거든 더욱 무심하여라

어디선가 ‘찌그덩 찌그덩 엇샤 ’, 노 젓는 소리에 강산은 더욱더 푸르러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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