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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의(義)를 지킨 부부 이야기
 

 

 

1910년 경술국치 이후가 되면, 기존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벌어졌던 일련의 운동들이 이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전환된다. 이 시기 안동을 비롯한 이 지역 사람들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핵심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만주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여 향후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다지는 것이고, 둘째는 이를 유지하기 위해 국내에 비밀결사단체를 만들어 꾸준히 사람과 자금을 지원하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편 대의정신으로 무장한 많은 선비들 가운데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일제의 만행을 미워하다가 조용히 목숨을 끊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을 자정순국자(自靖殉國者)라고 이른다. 여기에서 ‘자정(自靖)’이라는 말은 “스스로 의리(義理)에 편안히 머물다”는 뜻으로, 『서경(書經)』 「미자(微子)」 편에 그 전거가 보인다. 또한 ‘순국(殉國)’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다. ‘의리에 편안히 머물다’는 말을 곱씹어 보면,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올바른 가치관을 자신의 몸에 체득하여 이를 편안히 여기는 경지를 이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자정순국자들은 바로 ‘의(義)’라고 하는 가치관을 몸소 체득한 선비이며, 이 명분을 무기 삼아 ‘순국’의 길을 실천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경북의 자정순국자는 19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이고, 이 가운데 안동 출신으로서 포상 된 인물은 9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에는 부자, 부부, 숙질 등 가족 또는 집안 친척 관계에 있던 인물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목숨을 끊은 사례들이 있다. 시기상으로는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 전후, 고종 황제의 장례일(1919) 및 대상일(1921) 등, 그리고 1940년 창씨개명을 거부했던 이현구(李賢求) 지사의 단식순국까지 이어졌다.

 

 

<사진1>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상설전시관(독립관) 자정순국 전시공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는 ‘부부 자정순국자’로 알려진 이명우(李命羽, 1872~1921)·권성(權姓, 1868~1921) 부부의 유고집(遺稿集)인 『성재옹유고(誠齋翁遺稿)』(이하 『유고』)와 그들의 장례식을 치르며 발급되었던 제문(祭文), 만사(輓詞), 통문(通文) 등의 글을 따로 모아 엮은 『가장』, 『제문』, 『만제록』, 『부조록』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유고』 1책은 상설전시관의 ‘자정순국’ 공간에 따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2017년에는 『추상(秋霜)같은 의로움, 구국(救國)의 빛이 되다』라는 제목의 국역서로 간행되기까지 했다. 『유고』의 목차 및 저자는 다음과 같다.

 

 

<1> 성재옹유고』 목차 및 저자

 

이명우 부부가 직접 쓴 자필본 문서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이 가운데 『유고』는 책제목에서 드러나듯 이명우 부부가 직접 남긴 글을 모아 정리한 일종의 유고집 즉 ‘문집(文集)’이라고 할 수 있다. 크게 이명우의 유서와 권성의 유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작성 시기는 1920년 12월 19일(음) 독약을 마시고 순국하던 날 밤이다. 부부의 순국 과정에 관해서는 아들 이동희(李東熙)가 신유년(1921)에 쓴 「유사(遺事)」를 통해 간략히 알 수 있다. 이날 밤 이명우 부부는 아들과 며느리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어머니 삼년상을 마치는 기제사의 날짜를 조금 뒤로 물려 정하라 당부하고, 자신은 밤새 제문을 지어야 하니 각기 물러나 잠을 자도록 했다고 한다. 새벽에 둘째 아우[동묵(東黙)]가 밖을 나왔다가 두 분의 죽음을 발견했는데, 당시의 정황에 대해 “방에 등불이 훤했고, 남기신 두 통의 유서와 독약의 흔적이 뭍은 그릇 두 기를 발견했다”고 한다. 『유고』에 기록된 「비통사」·「분사」·「유계」·「계삼아」 등이 바로 이 ‘두 통의 유서’를 의미한다.

 

 

<사진2> 『성재옹유고』의 이명우 유서

 

 

이명우의 유서는 총 10편이다. 이 가운데 「비통사」는 나라가 망하고 임금과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상황 아래 자신의 비통한 슬픔과 순국의 의지를 밝힌 4언 배율(排律)의 장시(長詩)이다. 이어서 쓴 「분사」와 「유계」는 비분(悲憤)한 마음을 담은 시와 자식들에게 남기는 훈계의 글이다. 「분사」는 4언 배율 1수와 「우[又, 또]」 4언 절구(絶句) 4수로 이루어져 있다. 「유계」는 4언 배율 1수, 「우(又)」 15항의 훈계하는 글로 이루어져 있다. 「비통사」와 「분사」에서는 특히 서산(西山) 즉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꺾어 먹으며 절의를 지키고 죽은 중국 은나라의 충신 백이(伯夷) 숙제(叔齊), 의리를 위해 동해에 빠져 죽겠다고 다짐했던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출신 노중련(魯仲連) 등의 고사를 인용하여 충절의 의지를 다잡았다. 그리고 『맹자(孟子)』에서 언급한 ‘구차한 삶보다 의로운 죽음을 선택[熊魚之辨]’하려 했던 자신의 순국 의지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유계」에서는 자식들에게 유학(儒學)의 도리와 본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당부하고 있다.

이어서 쓴 4편의 글은 숙부 이연호(李延鎬), 친아우 이일우(李佾羽), 사우관계였던 초은(樵隱) 이내영(李來永)과 석산(石山) 이호직(李昊稙)에게 각각 남기는 편지이다. 상대와의 깊었던 정에 대한 서술, 당부하는 말, 죽음을 단행하겠다는 결의 등이 주된 내용이다. 이 편지들 역시 지친들에게 남기는 일종의 유서라고 할 수 있다. 다음 「경고」는 일반 대중인 동포들을 향해 쓴 시로, 4언 배율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의 강권에 대한 배척, 형제동포들의 힘으로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를 당부하는 일종의 포고문 또는 격문의 성격을 띤 글이다.

마지막으로 남긴 두 편의 제문은 이명우보다 앞서 1919년 고종황제의 장례일에 자정순국을 단행했던 하은(霞隱, 또는 石竿) 류신영(柳臣榮), 호남지역으로 이사 간 후 도의로 사귄 벗 춘담(春潭) 기동준(奇東準)을 위해 지은 것이다. 절의를 지킨 류신영을 추도하는 제문을 지었다는 점에서 이미 자신 역시 절의를 위해 죽음을 결행하고자 했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동준을 위한 제문에서도 상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자신 역시 충절과 효도를 끝으로 생을 마감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사진3> 『성재옹유고』의 권성 유서

 

 

의인 안동 권씨, 즉 권성의 유서는 옛 한글로 이루어져 있다. 세 아들에게 훈계하는 글인 「계삼아(戒三兒)」, 친정 아우에게 쓴 편지, 시숙부에게 쓴 편지, 시숙에게 쓴 편지, 두 며느리에게 쓴 편지의 총 5편의 글이 실려 있다. 그는 열부(烈婦)로서 죽음을 앞두고 “아내는 남편을 따른다[女必從夫]”는 의리를 앞세워 나라와 남편을 위해 “의리상 홀로 남을 수 없어[義不獨存]” “죽음의 길을 함께 가겠다[死必同歸]”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여필종부”는 유가적 질서로 시스템화 된 전근대시기 여성이 지키고자 했던 의리였고, 죽음으로 함께 하고자 했던 것 역시 당시 ‘정절(貞節)’이라는 덕목의 연장선이었다. 그때를 놓고 보면 바로 ‘의리’를 지킨다는 큰 명제가 밑바탕에 깔린 것이다.

또한 이 5편의 편지에서도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걱정 등 애절한 마음이 드러난다. 특히 「계삼아」의 말미에, 

 

이 악운(惡運)과 곤액(困厄)을 몇 해 사이에 다 보내고 좋은 바람 다시 불어 태평한 세상이 되거든 자손들이 집안에 가득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길 한없이 축원한다.

 

라고 한 부분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간절한 바람을 잘 드러내었다. 과연 한 집안의 ‘자애로운 어머니[慈母]’이자 ‘열부(烈婦)’이자 ‘여중군자[女士]’였다. 부부의 이러한 글을 통해 보면, 이들의 의식 밑바탕에는 바로 ‘의(義)’라고 하는 대전제가 깔려있었다. 『맹자』에서 언급한 “구차한 삶을 버리고 의로운 죽음을 선택함[舍生取義]”, 『논어(論語)』에서 언급한 “자신을 희생하여 인을 이룸[殺身成仁]” 이라는 말이 숭고할 수 있다는 점은 바로 이들의 행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유고』의 말미에는 성재(省齋) 권상익(權相翊)이 임술년(1922) 3월에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행장(行狀)」과 「의인권씨행록(宜人權氏行錄)」두 편의 글이 추가로 실렸다. 선대로부터의 내력, 살아온 이력 및 죽음을 맞이하게 된 과정과 이에 대한 평가가 주된 내용이다.

 

 

<사진4> 이명우, 권성 부부의 묘소

 

 

부부가 함께 유서를 남기고 순절한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서 이명우 부부의 자정순국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50여년의 생을 살다간 이명우의 생애는 크게 전반기(1872~1894)와 후반기(1895~1921)로 구분된다. 전반기의 경우 자신이 처한 지역사회 안에서 유림의 일원으로 효제(孝悌)를 실천하며 살았던 시기이다. 그러나 생애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그는 점차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그냥 바라 볼 수만 없다고 여겼다. 충의(忠義)의 길을 고민하던 끝에 결국 편안한 터전과 일상을 버리고 기꺼이 은둔 자정(自靖)을 선택했다. 그는 1912년 고향을 떠나 속리산 아래로 이사하였고, 이후 다시 계룡산 아래로 거처를 옮겼다. 나라가 무너진 것도 모자라 결국 임금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망국(亡國)의 부끄러움을 스스로에게 지워 매일 애태우며 살던 끝에 죽음을 선택했다.

이명우가 살았던 안동시 부포마을의 옛집은 매우 역사성이 깊은 곳이다.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헌신했던 백농(白農) 이동하(李東廈)가 먼저 살았던 곳이고, 이명우가 속리산으로 떠난 이후 이곳에는 6.10 만세운동을 선창했던 이선호(李先鎬)가 살았다. 독립운동가 세 집안이 거쳐 간 셈이다. 이곳의 현 주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못안길 38 (부포리 173-3)’이다. 절대 잊혀서는 안 될, 잊지 말아야 할 장소이다.

 

<사진5> 이명우, 권성이 살았던 부포마을의 옛 집

 

 

<사진6> 부포마을 옛 집터의 현재 모습

 

 

사람은 누구나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한다. 이 『유고』에는 누구나 싫어하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드려 의로움에 나아간 순절부부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이들이 남긴 단편 단편의 글들을 차근히 이어가다 보면 줄곧 ‘의열(義烈)’라고 하는 한 단어가 가슴에 새겨진다. 국난으로 어두웠던 시절을 살며, 부부는 단지 시절을 한탄하기만 하지 않았다. 의로운 죽음으로 오히려 역사의 빛이 되어, 죽었지만 영원히 살아있는 그들이기에 지금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안긴다.

몇 가지 의문점도 생긴다. 그들이 죽음으로 지키려 했던 확고한 의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이 해석한 ‘의’가 무엇이기에 누구나 싫어하는 죽음마저 담담히 받아드릴 수 있었을까? 흔히 의는 옳지 못한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그 단서가 있다고 한다. 민족의 공통적인 어려움을 안고서, 그 구성원 일부로서의 부부가 느꼈던 공적인 수치심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드릴 정도로 이토록 절실하고 통렬하게 드러났던 것 같다. 그러한 감정이 그야말로 ‘죽음’을 아름답게 여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과도한 표현이라 할 수 있을까?

 

 

<사진7> 『성재옹유고』의 국역집

 

 

필자는 2017유고의 국역집 간행을 담당 할 당시, 수차례 반복하며 그 내용을 읽어 본 뒤 이 국역집의 제목을 짓는 고심을 무척 오랜 기간 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책의 제목에 대한 고민은 위에서 언급한 여러 의문의 해답을 축약하고, 순절부부의 행적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자 마치 시호(諡號)’를 붙인다는 느낌으로 출발하고자 한 데서 나왔다. 만물이 무르익음과 동시에 움츠러드는 한가을의 서리는 한 마디로 매섭다. 이 어두운 시기의 초입에 내린 매서운 서리는 곧 부부의 매서운 죽음이자 동시대를 살았던 패악한 자들에 대한 평가와 단죄이다. 또한 부부가 갈구한 의로움은 바로 구국(救國)을 위한 의기이자 지향해야 할 목표였다. 온통 컴컴한 밤에는 한 줄기의 별빛마저 감사할 때가 있듯, 이들이 지켜낸 추상(秋霜)같은 의로움은 구국으로 지향·관철된 한 줄기 별빛과도 같아서, 예나 지금이나 항상 그 자리를 지키며 지금의 우리들에게 의로운 삶, 올바른 삶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자상히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추상같은 의로움, 구국의 빛이 되다로 짓게 되었다.

의롭지 못한 시대적 상황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던 당시의 의사(義士)들은 더러는 살아 위급한 당면의 문제를 여러 방략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고, 더러는 이들 부부와 같이 죽음으로 떳떳한 본성을 지키고 이를 지켜보았던 많은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그렇게 보면 죽음이라는 것도 매 한 가지만은 아닌 듯하다. 이른바 홍모(鴻毛)보다 가벼운 죽음과 태산(泰山)보다 무거운 죽음을 나누는 기준이 바로 이 유고에 담긴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적 사실로 반증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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