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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찬 철관에 묻혀버린 의로운 외침
 

 

 6월 6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현충일’로 지정된 날이다. 멀게는 6.25 한국전쟁과 가깝게는 6.29 연평해전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었던 일도, 그 시작이 6월의 일이었다. 그래서 국가보훈처에서는 나라를 수호하려던 그들의 공훈에 보답하고자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하였다.

6월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전두환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벌어진 6.10 민주항쟁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적 관점에서 우리는 대내외적으로 거대한 폭력에 맞서왔다. 그 거대 폭력은 시기와 현상만 달라서 어떤 때는 ‘제국’일 수 있고, ‘독재’일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는 그렇게 항거하던 무수한 분들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우리들의 ‘6월’이다.
6월 10일은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날이기도 하다. 1926년 6월 10일, 순종황제의 인산일에 때를 맞추어 다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제2의 3.1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사건은 ‘6.10만세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에 의해 주도되었고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는지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만큼 우리의 역사교육과정에서 3.1운동보다 주목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는 이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불의에 순국한 권오설(權五卨, 1897~1930)에 관해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그는 본관은 안동, 자는 윤백(倫伯), 호는 막난(莫難)이다. 홍일헌(洪一憲) · 권일(權一) · 박철희(朴喆熙) · 김삼수(金三洙) · 김형선(金亨善)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출신지는 안동 가일마을이다. 그의 부친 소암(小巖) 권술조(權述朝)는 당대 한학자로 이름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을 통해 한학을 배웠다. 1907년 남명학교(南明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과 한학을 함께 배우다가, 1909년 이 학교가 하회에 있었던 동화학교(東華學校)에 편입되면서 이곳을 다니게 되었다. 1914년 동화학교 졸업 후 1916년 현 경북고등학교의 전신인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년 만에 그만두고, 다시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와 경성부기학교(京城簿記學校)에 들어갔다. 이후 1918년 전남도청에 부임하여 근무하다가, 1919년 광주 3·1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체포되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3.1운동 전까지의 행적이다.
 
 
<사진3> 풍산 가일마을
 
 
1919년 3.1운동 이후 고향 안동으로 돌아온 그는 풍산학술강습회 · 풍산소작인회 등을 조직하여 교육계몽 및 농민활동을 하였고, 곧 서울로 올라가서는 노동운동과 신흥청년동맹 · 화요회 등 사회주의운동에도 핵심적으로 참여하였는데, 특히 1925년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과 책임비서를 맡았다. 이후 1926년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르던 가운데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렇듯 그는 약 34년의 일생동안 사회운동과 계몽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투신 한 셈이다.
 
 

<사진4> 풍산학술강습회 하기강습회 청강생명부

 
1920년대 안동을 비롯한 경북지역의 독립운동은 3.1운동 무렵부터 국내로 들어온 사회주의가 항일투쟁에 강력한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투쟁은 농민운동·노동운동·청년운동 등의 방향으로 강하게 나타났다. 권오설 역시 이러한 사회주의적 성향의 단체들을 설립하고 참여하면서 투쟁성을 강하게 드러내었는데, 그가 이끌어 낸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 가운데 하나가 바로 6.10만세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중심은 권오설을 비롯하여 김천 출신의 김단야(金丹冶) 등 조선공산당 간부 출신자들이었다.
권오설은 1926년 4월부터 메이데이 시위를 계획하던 도중 순종황제의 초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의 방향을 순종의 인산일에 진행하는 것으로 수정하였다. 그는 3.1운동처럼 온 겨레가 참여하는 항일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또는 종교계·청년계·학생계의 통합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6월 4일 일제 경찰에 이러한 계획이 노출되었고, 권오설은 결국 6월 7일 체포되게 된다. 시위가 무산 될 위기에 처해졌지만, 인산일 당일 안동 부포마을 출신으로 당시 중앙고보 학생이었던 이선호(李先鎬)가 종로 단성사 앞에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확산되면서 6.10만세운동이 번지게 되었다. 이선호는 당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상무를 맡고 있었다.
 

<사진5> 6.10만세운동 약도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통합을 시도한 민족유일당 운동과 1927년 이 두 계열의 합작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는 마치 3.1운동이 위정척사계열과 계몽주의계열의 통합을 이끌어 내었던 것과 같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러한 만세시위의 가장 중심에 안동 출신의 권오설과 이선호가 있었던 것이다.
 
 

<사진7> 부포마을의 모습

 

이렇게 체포 된 권오설은 약 20개월 동안 힘든 재판과정을 거친 뒤 19282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 사이 그의 큰 아우 권오기(權五夔)는 서대문형무소를 드나들며 옥바라지를 했고, 함께 활동을 했던 안동 출신 동지인 김남수(金南洙) 등도 이를 도왔다. 이후 그는 감형이 되어 19307월에 출옥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출옥 100일을 앞둔 1930417일 그가 형무소 안에서 갑자기 순국했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그의 시신은 철관에 담겨 안동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일제의 삼엄한 경비 아래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수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꺾이지 않았던 그의 의로운 외침은 결국 차디찬 함석철관 안에 묻혀 침묵하게 되었다.

 

 


<사진10> 권술조의 제문

 

현재 권오설의 후손이 소장한 권술조가 아들 권오설을 애도하며 쓴 제문(祭文)에는 권오설의 출생과 활동이력 및 순국과정 등이 길게 서술되어 있다. 이 철관에 얽힌 당시의 이야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권술조는 1930227일 막내아들 권오직(權五稷)이 구속된 후 몇 개월 뒤인 417일에 갑자기 권오설이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권오기가 급히 형무소로 가 보지만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고, 형의 최후를 함께 보내고자 외박을 신청했지만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권오설은 다음날 사망하였다. 시신은 신간회 사무소에 임시로 두었다가 고향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도 일제의 감시와 경계가 심했고, 공동묘지에 봉분이 없는 평장(平葬)으로 장사를 지내면서 조문객의 방문을 일체 엄금하였다고 한다.

 


<사진11> 발굴 당시의 철관

 


<사진12>
전시된 철관의 모습


철관은 몸체와 덮개 모두 함석철로 이루어져 있는데, 얇은 철판이 2중으로 접합되어 있다. 몸체와 덮개 사이에는 납땜 한 흔적이 남아 있다. 철관과 관련하여 집안과 마을에서는 철관의 존재에 관해 그냥 그렇게 되었다던 소문만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2008414일 부인의 묘소와 합장하기 위해 봉분을 여는 과정에서 이 관의 실체가 드러났다. 발굴 당시 원형이 어느 정도 유지된 자재들은 나무로 만든 모형 틀에 씌워 복원을 마친 후 현재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상설전시실에 안치해 전시하고 있다. 나머지 파손된 덮개 윗부분과 녹이 슬어 바스러진 몸체 하단 등에서 나온 철 파편들은 수습 후 보존·밀봉 처리하여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그의 침묵은 그가 순국한지 78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 관은 원래 그의 시신이 서울에 있을 때 임시로 제작했던 것이다. 안은 송판으로 만들고 시취(屍臭)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겉에 함석판을 대고 납땜하여 고향으로 옮기게 되었지만, 장사 지낼 때 일제는 다른 관으로 교체하지 못하게 한 채 그대로 묻게 했다고 한다. 떠도는 이야기로 일제가 권오설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일부러 철관에 묻었다고 한 것은 잘못된 말이다. 하지만 그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만으로 일반적인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게 막으면서 관마저 다른 것으로 교체하지 못하게 했던 일제의 만행은 여기에서조차 그 폭력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해방 이후 그의 후손들은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는 명목으로 인해 무수한 고난을 겪었다고 한다. 제국주의와 이념갈등으로 빚어진 우리의 안타까운 역사이자 현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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