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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의 기록, 「김순흠전(金舜欽傳)」
 

 

 

일제에 의해 나라가 혼란해지고 무너지려 할 때 ‘의(義)’를 기준에 둔 이곳 전통 유림들은 크게 세 가지의 방향으로 대응점을 찾아갔다. 첫째는 강력한 ‘척사(斥邪)’사상을 바탕으로 의병을 일으켜 무력항쟁을 이어갔고, 둘째는 ‘위정(衛正)’의 한 방식으로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여 유학의 도통을 지키고자 했으며, 셋째는 화이(華夷)관념을 통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오랑캐와는 다름을 표현하고 문화인으로서 긍지를 지키고자 했다. 나라와 민족, 자신이 고수하려던 바른 도리를 지키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의를 지켰던 방식을 우리는 흔히 ‘자정순국(自靖殉國)’이라고 표현한다.

 

 

<사진1>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독립관 자정순국 전시패널

 

 

일제강점기 자정순국을 한 경북인은 전국에서 가장 많고, 그 가운데 안동출신의 지사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사실은 앞서 5월에 실은 이명우‧권성 부부의 순절이야기를 통해 이미 언급하였다. 그들은 “무엇이 나에게 이득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보다 “무엇이 옳은 길인가” 라는 고차원적 정신의 발현을 통해 죽음을 달게 받아들였다. 여기에서 ‘옳다’는 말은 한자로 표현하면 ‘의’이다. 바로 의라는 가치를 통해 그들의 죽음은 단순한 ‘자살’이 아닌 이른바 ‘순교’적 행위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자정순국의 방식은 다양했지만, 이곳 유림들이 택한 방식은 주로 단식이었다. 나라를 위해 의를 지키고자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 자체가 유교에서 언급한 “신체발부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효(孝)의 가치와 때로는 어긋날 수 있었다. 따라서 신체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며 효를 지키고자 했던 의식에 가장 걸맞은 방식으로 여겨졌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자정순국의 전형을 보여준 풍산김씨 출신 김순흠(金舜欽, 1840~1908) 선생과 관련한 자료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려 한다. 그는 안동문화권 안에서 가장 앞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상징적인 분이기도 하다. 그의 자정순국에 대해 흔히 알려진 표면적인 이유로 ‘1908년 우리나라의 세금이 일제에 납부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는 애초에 의병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거나 을사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배포하는 등 상소운동도 펼쳤다고 전해진다. 의병을 이끌고 상소운동을 펼치다가 나라가 무너지자 자정순국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동은(東隱) 이중언(李中彦),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등과 같은 순국지사들에 앞서 그 선례를 보였던 조선의 선비였다.

 

 

<사진2>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의열관 독립운동 마을 전시패널

 

 

『풍산김씨세보(豊山金氏世譜)』를 참고하면, 김순흠 선생은 본관은 풍산, 자는 치화(穉華), 호는 죽포(竹圃)이다. 심곡(深谷) 김경조(金慶祖)의 후예로 부친은 중관(重瓘)이고, 아들 4형제는 각기 낙보(洛輔)‧낙모(洛模)‧낙정(洛楨)‧낙문(洛文)이다. 그는 자정순국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이 서훈에 가장 중심된 근거로 활용된 자료는 후손의 증언과 함께 기려자(騎驢子) 송상도(宋相燾)가 쓴 『기려수필(騎驢隨筆)』이 있다. 『기려수필』은 저자가 직접 정리하여 엮은 5권짜리 책과 미완된 일부의 원고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수습하여 1955년 한국사료총서 제2권으로 단권 편찬하여 전한다. 또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저자가 직접 독립운동가와 관련한 제지역에 현지답사를 하며 총 239명의 사적에 대해 취재‧채록하여 엮은 것으로 독립운동 인물과 사적에 대한 당대의 실제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하지만 『기려수필』의 내용은 수록된 인물의 주된 활동과 공적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김순흠 개인의 전반적인 생애에 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지 않다. 또한 김순흠의 개인 문집으로 『죽포문집(竹圃文集)』 또는 『죽포실기(竹圃實記)』가 전해진다고 하지만 편집경위나 소장현황 등 제반 사항에 관해 현재까지 자세하지 않다. 따라서 그에 대한 사적은 『기려수필』이나 후손의 증언을 제외하면 관련된 여러 단편 자료들을 모아보는 수밖에 없다.

  

 

<사진3> 김도화(金道和), 「김순흠전(金舜欽傳)」(『척암집(拓庵集)』별집(別集))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된 『척암문집(拓庵文集)』의 별집(別集)에는 김도화(金道和)가 쓴 「김순흠전(金舜欽傳)」이 실려 있다. 김도화는 안동 전기의병의 대장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기려수필』이 김순흠 개인에 대해 집중하여 서술되었다면 「김순흠전」은 김순흠의 간략한 사적과 아울러 그의 순국 이후 아들과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상설전시실의 ‘자정순국’에도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순흠 전

사인(士人) 김순흠(金舜欽)은 풍산(豊山) 사람이다. 안동 오미동(五美洞)에서 세거(世居) 하다가 중년에 협촌(峽村)으로 이거(移居)하여 생계를 꾸렸다. 을사년(1905)에 왜놈들이 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음식을 끊고 스스로 맹세하며, “내가 죽거든 햇곡식으로 나를 제사지내지 말라.” 라고 했다. 결국 그가 단식순국 한 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 비웃었다. 그의 재기일(再朞日, 상이 난 지 두 해째 되는 기일)에 그의 아들 낙룡(洛龍)이 직접 중국의 만여 리를 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 한 움큼을 캐다가 장차 귀국하여 그의 부친의 제사를 지내려 했는데, 귀국 도중에 한일합방(한일강제병합, 1910) 고시문을 보고 결국 칼에 엎어져 목숨을 끊었으니, 대개 그의 아버지의 지조(志操)를 계승한 것이다. 그의 처 아무개 씨는 집에 있으면서 그 소식을 듣고 또 스스로 목을 매고 지아비를 따랐다고 하니, 아! 열부(烈婦)로다!

찬(贊)한다. 아들이 죽자 그의 아버지의 충정이 더욱 드러났고, 며느리가 죽자 그의 지아비의 효성이 더욱 드러나니 삼강(三綱)은 이 한 집안에 모여 있도다. 아! 충신의 집안에는 반드시 효자가 있게 되고, 효자의 문중에는 반드시 열부가 있게 된다는 점은 진실로 이를 두고 한 말이로다!

(金舜欽傳 金士人舜欽者 豊山人也 世居安東之五美洞 中歲移寓峽村而食力計 乙巳聞日倭契約之報 卽絶食自誓曰 我死勿以新穀祭我 遂死之 人皆以迂僻笑之 及再朞 其子洛龍身往中國萬餘里 採首陽山薇蕨一掬 將歸祭其父 至中道見合邦文告 遂伏劒而死 蓋繼父之志也 其妻某氏在家聞之 又自經而下從云 嗚呼烈矣 贊曰 子死而其父之忠益彰 婦死而其夫之孝益著 三綱萃于一室 嗚呼 忠臣之家 必有孝子 孝子之門 必有烈婦 誠哉是言也)

 

첫머리에 “김순흠은 안동 풍산 사람으로 오미동에서 세거하다가 협촌으로 이거하였다.” 라고 한 말은 대체로 『기려수필』의 내용과도 같지만, 김도화가 표현한 ‘협촌’은 『기려수필』에서는 ‘감천(甘泉)’으로, 예천 맛질마을 출신 나암(羅巖) 박주대(朴周大)의 일기(1908년 기록, 이하 『나암수록(羅巖隨錄)』)에서는 ‘섬평(剡坪)’의 김씨노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감천’은 현 예천군 감천면 진평리 411번지로서 그가 생활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집은 없고 터만 남아 수풀이 우거져있다. ‘섬평’은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일대의 ‘섬계(剡溪)’라기 보다는 영주 무섬마을의 섬계(剡溪) 권수원(權壽元) 고택(古宅)이 있는 일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박주대가 살았던 맛질마을에서는 감천이든 무섬이든 모두 동쪽에 있었고, 일기의 내용에서도 그의 순국 당시 즈음에야 그에 대한 존재를 알았던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아무래도 인근에 떠돌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일기에 서술해 놓은 듯하다.

 

 

<사진4> 김순흠 집터(예천군 감천면 진평리 411번지)

 

 

그의 출신지인 ‘미동’에 관해서는 『기려수필』과 『나암수록』에도 모두 ‘미동(美洞)’ 또는 ‘오미동(五美洞)’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1971년 예천군 남산공원에 세워진 「순국열사죽포김선생기념비문(殉國烈士竹圃金先生紀念碑文)」에는 ‘풍산면 증수동(增壽洞)’이라고 되어 있고, 국가기록원의 「김순흠 공훈록」에는 ‘풍산면 수리(水里)’로 기록하고 있다. 증수동이나 수리는 현 안동시 풍산읍 수곡리 일대이며, 오미동은 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인데, 이 두 곳은 지금도 거리상으로 약 10Km정도 떨어져있다. 따라서 위의 세 자료에서 언급된 ‘오미’는 풍산김씨의 세거지인 오미동을 범칭(汎稱)하여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5>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소재의 오미마을 광복운동기념비

 

  

<사진6> 예천군 예천읍 남산공원의 순국열사죽포김선생기념비

 

 

 그의 단식과 순국 시기에 대해 김도화는 “을사년(1905)에 왜놈들이 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음식을 끊었다.”고 하고 정확한 일자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기려수필』에는 단식한지 23일만인 무신년(1908) 9월 28일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고, 『나암수록』에는 무신년 10월 8일 그의 순국에 대한 기사를 적으면서 “그가 단식한지 ‘9일’ 또는 ‘23일’만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되어있다. 확실한 사실은 1908년에 단식‧순국 했다는 것인데, 23일만에 순국했다고 하면 이 해 9월 5일경에 단식을 시작했다는 것이 된다. 또한 『나암수록』에 언급된 또 다른 설인 ‘9일 단식’의 경우는, 그가 처음 단식을 시작하자 그의 며느리가 ‘친영(親塋)을 이장하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음식을 올리기에, 이를 옳게 여긴 그가 잠시 단식을 그만두었다가 부친 묘소의 이장이 다 끝나고 다시 단식에 들어가 9일 만에 순국했다는 것이다. 김도화는 또한 “그의 재기일에 아들 낙룡이 중국에 가서 고사리를 꺾어 돌아오다가 한일합병의 고시문을 보고 자결했다.”고 하였다. 재기일은 고인의 초상이 난지 2년째 되는 해를 의미한다. 따라서 ‘을사년 이후 음식을 끊었다’는 기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음식을 끊었다는 말로 볼 수 없고, 그 역시 전해들은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어느 정도 정확하지 않는 부분은 누락시키고 정확한 사실만 채록하다보니 이렇게 기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일합병’은 경술국치(한일강제병합)를 당한 1910년을 의미하므로 2년 전은 1908년이다.

 

 

<사진7> 『풍산김씨세보』, 김순흠 세계

 

 그의 유언인 “내가 죽거든 햇곡식으로 나를 제사지내지 말라.”는 말은 모든 자료에 대동소이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제의 땅에서 난 음식은 먹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제사에 받아드리지도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의 효부(孝婦), 즉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는 『기려수필』‧『나암수록』과 조금 차이가 있다. 『기려수필』에는 그의 며느리가 나라가 무너지기 전에 수확해 두었던 묵은 곡식과 도라지 등을 올리며 드시길 권하자 조금 맛보고 물렸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암수록』에는 앞서 언급한 ‘친영의 이장 일’로 음식 드시기를 권유했던 이야기, 시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그가 생전에 기르던 곡식과 산곡에서 나온 물품으로만 제사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김순흠전」에는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빠진 채 “낙룡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 죽었다.” 라고만 하였다. 앞서 기록된 두 이야기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기록도 의문점이 있다. 『풍산김씨세보』에 수록된 김순흠 맏아들의 인명은 ‘낙룡(洛龍)’이 아닌 ‘낙보(洛輔)’로 되어 있고, 그의 배위인 순천김씨(順天金氏)는 기유년에 사망했다고 되어 있다. 기유년은 1909년으로 추산되는데, 낙보의 몰년이 1910년인 것에 비해 한 해 전에 이미 사망하였던 것이다. 족보의 기록이 잘못되었거나 김도화가 잘못 전해 들었을 수도 있다.

김순흠의 맏아들 인명에 관해서도 언급 될 필요가 있다. 그는 족보에 ‘낙보’로 되어있지만 후손의 진술을 통해 ‘낙용’으로도 불렸다는 점도 확인된다. 또한 「순국열사죽포김선생기념비문」에는 낙용의 ‘용’자를 ‘용(龍)’자가 아닌 ‘용(鏞)’자를 써서 ‘낙용(洛鏞)’이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낙보와 낙용은 동일인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순흠전」에 기록된 그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일제의 땅에서 난 햇곡식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직접 중국의 수양산까지 가서 고사리를 꺾어 돌아오던 도중에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도 따라 죽었기에, 김도화는 이를 두고 “한 집안에서 삼강의 도리가 드러났다”고 극찬하였다. 부자가 자정순국 한 사례는 류도발‧류신영 부자가 있고, 부부가 함께 순절한 사례는 이명우‧권성 부부가 있다. 이러한 상황 못지않게 김순흠의 아들과 며느리 역시 경술국치로 인해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고 하니, 만일 김도화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자정순국의 여러 사례 가운데 의(義)‧효(孝)‧열(烈)을 모두 실천한 매우 중요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기록이 여타 자료들에는 언급조차 없어서 자세히 밝히는 것은 어렵다. 다른 자료들이 발굴되길 기대 할 따름이다.

 

 

<사진8>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독립관에 세운 김순흠 위패

 

 

이처럼 김도화가 쓴 「김순흠전」은 『나암수록』과 함께 자정순국자 김순흠 선생에 관한 소략한 정보를 보충해 주는 중요한 기록이며, 아울러 기존 자료에 없던 새로운 내용도 제시해 준다. 이러한 자료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발굴되어 독립운동가들의 사적을 풍부하게 복원하고 밝힐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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