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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김창숙이 류인식에게 보낸 편지
 

 

 

경상북도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자랑스러운 경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고 경북의 혼을 바로 세우기 위해 2012년부터 ‘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하여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8월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인물은 전통 유림 출신으로 제1, 2차 유림단 의거를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이다.

 

 

<사진1>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경북 이달의 독립운동가

 

 

그는 본관은 의성,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직강(直岡)·벽옹(躄翁) 등이 있다. 그의 독립운동 활동 방향은 매우 방대하고 다양한 계열에 걸쳐 있었다. 어린 시절 전통 한학을 배우며 자라 주로 성주지역의 문단을 이끌었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계열의 한주학파의 문도들과 교유하였다. 이후 일제에 의해 나라가 혼란해지자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1907년 성주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이듬해 대한협회 성주지회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그의 스승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안동 전기의병 의소(義所) 참여자 명단에 들었지만 실제로 부임하지 않은 것처럼 그 역시 강력한 위정척사사상을 바탕으로 한 의병에 종사하기 보다는 유림의 구습과 봉건적 신분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애국계몽계열의 구국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이후 1910년 나라가 무너지고, 1919년 전개된 3.1운동이 유림의 대표가 빠진 상태로 진행되었던 것을 보고는 유림이 주체가 된 독립운동을 펼치고자 준비했던 것이 파리장서운동 즉 제1차 유림단의거였다. 이때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도 활약하였다. 결국 파리장서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해 가을에 그는 중국 광둥으로 가서 쑨원 등의 인사들을 만나 독립 지원을 요청하고 한인 유학생을 돕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20년에는 광둥군정부의 내분을 겪은 뒤 상하이로 귀환했다가, 10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결성하고, 11월 베이징으로 가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천고(天鼓)」 간행을 도왔다. 1921년에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에 대해 반대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베르사유 체제로 정리되고, 일제의 강제지배가 장기화 될 것이라 여긴 그는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기지 건설 자금을 마련하고자 준비 한 끝에 1925년 국내로 잠입하여 유림 사회를 중심으로 경상도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았다. 이 사건이 바로 제2차 유림단의거라고 한다. 이때 모금된 3,000여 원의 자금으로 1926년 나석주 의거를 지원하는 등 의열투쟁에도 관여하였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듬해 1927년 일경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고, 1928년 징역 14년을 선고 받아 대전형무소에서 혹심한 옥고를 치렀다. 그 후유증으로 앉은뱅이가 되고 병이 위중해져 1934년 가출옥 되었고, 1945년 광복 직전에 조선건국동맹에 참가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다시 붙잡혀 해방 이후에 출감되었다.

그의 활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46년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반독재 민권쟁취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2년 향년 84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하였다. 여기까지가 김창숙 선생의 대략적인 이력이다.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선생의 손자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류인식 선생의 유품을 다량 기증 해 주신 류기원 님의 기증품 가운데에는, 현재 김창숙 선생의 편지 1통이 기념관 상설전시관에 소개되어 있다. 이 편지는 그가 1921년 1월 14일, 중국 상하이에 유학 왔다가 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화영(華永)’이라는 인물의 병원비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류인식에게 보낸 편지이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4> 1921년 김창숙이 류인식에게 보낸 편지

 

 

처음, 상대가 부친상을 당한지 이미 1년이나 지났으니 효자의 마음에 애통함이 끝이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슬픔을 잘 절제하여 버티기를 당부하였다. 본론으로, 상대의 친족인 화영 군이 지난 해 여름에 만주 봉원(奉垣)의 집에서부터 상하이로 유학을 왔다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래서 상해공립의원(上海公立醫院)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비용만 쌓여갈 뿐 소생할 방법이 없어 다시 서양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하였다.

치료비가 쌓여 약 400원에 이르렀는데 갚을 길이 없어서 독촉 받다가 쫓겨날 상황이고, 화영이 예전 알고 지내던 학우가 어렵사리 100원을 마련하여 보태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였다. 화영의 본가인 봉원에서도 흉년이 들어 병치레하기 어렵다는 등의 사정을 알리며, 상대에게 치료비를 넉넉히 보내 달리고 요청하고 있다.

추록에는 송금 장소로 ‘상해 남시(南市) 상해공립의원 3루(樓) 32호실’을 쓰고, 화영이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사진5> 기념관 전시실에 전시된 모습

 

 

이 편지가 발급된 1921년 초반은 김창숙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 할 때이다. 화영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로서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단주(旦洲) 류림(柳林, 1898~1961)의 본명이다. 류림과 류인식은 모두 안동에 소재한 전주류씨 삼산문중(三山門中)의 후예들로, 류림이 류인식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항렬로는 집안 숙부뻘 된다.

많은 재론의 소지는 있지만, 류림은 1921년 초반 당시 베이징에서 신채호의 「천고」 발간을 도왔고,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이 행적은 김창숙이 1920년 후반부터 베이징에서 신채호와 함께 거주하며 해당 잡지 발간을 도왔던 일과 시기상 겹친다. 따라서 류림이 당시에 실제로 불치병에 걸렸는지는 의심 할만하다.

300원이라는 금액 역시 병원비로 요구하기에 매우 많다. 1926년 제2차 유림단의거 당시 영남 유림들이 땅을 팔아 군자금으로 내 놓은 단위는 거의 3~400원이었다고 한다. 또한 류인식이 부친상을 당한 시기는 이로부터 약 5년 뒤인 1924년이어서 편지 서두에 언급한 부친상에 대한 위로는 시기상 맞지 않다. 따라서 이 편지의 발급 목적이 일제의 검열과 감시를 피하여 독립운동 활동자금을 부쳐달라는 요구가 아닌가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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