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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광풍정과 제월대’
 

    

 
광풍정이 있는 금계리는 고려 초기 이래 삼태사의 한 사람인 장정필의 후예 안동장씨의 집성촌이다. 광풍정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성리학자요, 김성일과 류성룡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아 영남학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바 있는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가 300여 문인들에게 강학하던 유서 깊은 정자이다. 뒷편의 자연 암석은 경당이 제월대霽月臺라 명명했고 능주목사 김진화가 경당선생제월대敬堂先生霽月臺라는 암각서를 남겼다. 이 건물은 경당 장흥효가 1630년에 이 위치에 초당으로 건립한 누각으로 1838년(헌종 4)에 지역 유림들에 의해 고쳐지어졌다.
 

광풍정(앞)과 제월대(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2호로 지정된 광풍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우측 협칸을 통칸 마루로 놓아 우측 마루 위의 판문을 열고 오르도록 되어 있다. 중앙에 있는 온돌방 전면 1칸은 마루칸으로 하여 우측 협칸의 통칸 마루와 함께 중앙의 1칸 온돌방을 에워싼 형태를 하고 있다. 좌측 협칸은 1칸 반을 온돌방으로 꾸미고 전면의 반칸은 툇마루로 구성했다. 동북향을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마루공간과 온돌방이 대각선으로 구성된 듯한 독특한 정자 건축 양식이다. 이는 하절기의 외부환경을 최대한 배려한 환경친화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면의 누하주는 막돌기단 위에 큼직한 덤벙주초를 놓고 팔각주를 세웠으며 누상주는 전면에 원주를 세웠으나 나머지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다.
 

옆에서 보는 광풍정

 

정자는 주로 주변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기 때문에 인가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정자에서 사람들은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을 완상하면서 시적 정취에 빠지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의 도리나 이치를 발견하거나 마음의 수양을 얻는 데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광풍정은 이러한 정자의 일반적 경향과는 거리가 있다. 처음부터 경관의 아름다움을 완상하는 지점을 선정하고 거기에서부터 시적 정취나 도학적 수양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아예 도학적 수양을 위한 공간이라는 목적이 뚜렷이 부각된 건물이다.

 

최현이 쓴 경당기에 의하면, 정자의 이름을 ‘광풍’으로 쓰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정자의 뜻을 취하여 ‘경’으로써 서재를 이름하고, 인하여 자호로 삼았다. 또 삼가 여산의 기상을 사모하여 ‘광풍’으로써 정자의 이름을 짓고, ‘제월’로써 대의 이름을 지었다. 무릇 경이 아니면 그 길이 두셋으로 나뉘어져 일신도 주체할 수 없을 것이요, 비록 청풍명월이 있을지라도 한갓 이목을 즐겁게 하고 심지를 방탕하게 할 뿐이니, 어찌 능히 쇄락한 금회를 가질 것인가? ‘경’이라는 것은 이 마음을 수렴하는 바로써, 광풍제월의 연원이 되는 것이요, 광풍제월은 쾌활하고 유행하는 것으로 이 경의 공용功用이 된다. 체와 용이 서로 필요한 것이고, 표리가 간격이 없으 제월대 ‘경당장선생제월대’라 새긴 바위글씨가 선명하다. 니, 가히 두 가지로 볼 수 없다.”

 

제월대 ‘경당장선생제월대’라 새긴 바위글씨가 선명하다.

 

경당기의 내용을 풀어보면, 장흥효는 자신을 ‘경’으로 자호(自號)하여 체體로 삼고 광풍제월은 그 용用으로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송나라의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 염계濂溪의 인품을 “가슴 속의 맑고 깨끗함이 광풍제월과 같다.”고 한 말에서 취한 것이다.

 

광풍제월이란 말은 ‘비 갠 뒤의 바람과 달’이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결국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도학 공부는 곧 마음공부요, 마음공부는 체용으로 하되, 경을 체로 삼고, 광풍과 제월을 용으로 삼아 매양 부릴 수 있도록 수양하겠다는 것이다. 광풍은 바른 마음을 세우는 빛[光]과 같은 양의 작용[風]이요, 제월은 달[月]을 훤히 볼 수 있도록 가린 구름을 걷어내는 것처럼 거짓된 마음을 비워내는 음의 작용[霽]이다. 그 때문에 광풍정은 바른 마음을 세우듯 당우를 세울 수 있지만, 제월대는 걷어내고 비우는 것이므로 바위대를 그대로 비워두었던 것이다.

 

제월대에서 내려다본 춘파, 봉정사를 품고 있는 천등산 줄기가 아련하다.

  

제월대와 광풍정이 있는 곳은 춘파(봄의 언덕)라 불릴 만큼 사람 살기에 좋은 땅이며 그 주변의 자연경관 또한 뛰어나다. 광풍정은 매우 특이한 정자다. 성리학적 이상, 더 구체적으로 퇴계의 ‘경’ 사상이 장흥효에 의해 더 철저하게 자연과 생활 공간 안에 투사된, ‘도학 수련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광풍제월은 그 겉보기 이름처럼 낮에는 밝은 태양을, 밤에는 구름 벗어난 아름다운 달을 완상하는 단순한 풍류 공간이 아닌 것이다.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금지라 불렀으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이곳으로 옮겨와 검재로 고치고 한자로 금계라 적었다. 금계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원주변씨, 의성김씨, 안동장씨의 집성 마을이다.

  

안동의 향토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금음지 또는 금계라 한다. 옛날부터 ‘천년 패하지 않는 땅[千年不敗之地]’이라 했다. 사복정 배상지가 여기에 살았는데 백죽당이 있다. 용재 이종준, 판서 권예도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 선생이 임하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적고 있다. 이것으로 조선 전기에 금계 마을의 대표 성씨는 흥해배씨와 안동권씨였고, 조선 중·후기에는 학봉 선생의 후손인 의성김씨라 할 수 있다.

  

학봉 선생은 금계에 사는 권덕황의 사위가 되어 1582년에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학봉 선생은 이 금계에 1년 반 정도밖에 살지 않았지만 『주자서절요』와 퇴계 이황(1501~1570)의 『자성록』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청성산 기슭에 석문정사를 지어 이 지역 학문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금계 1리에 있는 학봉종택은 원래 현 위치에 지었으나 침수가 자주 된다 하여 8대손인 광찬光燦이 1762년에 소계서당邵溪書堂 자리에 새로이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그러나 그 후 다시 현 위치로 옮겼다. 소계서당은 구한말 학봉 선생의 11대 종손이자 영남을 대표하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강학소이다.

  

광풍정 편액, 조금은 납작한 글씨여서 시원함보다는 답답함이 보이지만
안정되고 얌전한 해서체이다.

  

‘천년불패지지’라 불리는 서후면 금계리와 춘파로 이어지는 길은 댓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를 맑게 하고, 시냇가에 비치는 달은 내 마음속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그리움을 들추어낸다. 광풍정과 제월대는 자연을 막지 않고, 거스르지도 않았으며, 그저 생긴 그대로를 가슴으로 받아 안아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광풍정과 제월대는 자연 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자연과 하나 되고자 했던 선조들의 지혜와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는 우리 정자 건축의 아름다움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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