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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지락, 자연을 벗 삼아 누리는 즐거움’ 어락정(魚樂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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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달라졌다.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한파도 제법 수그러드는 기미가 보인다. 이제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바람 좋은 날, 유교문화길로 접어든다. 유교문화길은 하회마을이 한국의 역사 마을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2010년에 조성된 안동을 가장 안동답게 느낄 수 있는 둘레길이다. 가장 안동답고, 안동이기에 느낄 수 있고, 안동이어서 누릴 수 있는 길이기에 어느 곳보다 천천히 그리고 진중하게 둘러보면 그 깊이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오늘 찾아가는 길은 유교문화길 중에서 효부골에서 병산서원을 이어주는 길이다. 이 길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우리 문화유산 답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유홍준 교수가 극찬에 극찬을 아끼지 않은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답사기를 쓰면서 이 길만큼은 비포장 길로 남아 있어 주기를 소망했지만, 흙먼지 뒤집어쓰면서 살아야 하는 주민들의 삶과 맞부딪치며 온전히 비포장 길을 지켜내기에는 힘에 겨웠는지 지금은 포장길로 바뀌었다. 안동시에서는 주민들에게 현실로 닥친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최소한의 포장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누구에게도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은 공존과 소통의 길로 남겨지게 된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어락정, 풍산들과 낙동강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안동의 진산인 학가산(오른편 위)이
정상에 하얀 눈을 머리고 이고 있는 목가적 풍경이 아름답다.

유홍준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해 질 녘, 풍산들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걸어 들어가는 길은 인적이 끊어져 고즈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지만 그래도 외롭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낙동강이 나를 반기며 끝까지 동행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 입구에 들어섰다. 산허리를 끼고 도는 길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저만큼 아래 강물은 흐르지 않고 정지된 듯해 그리움마저도 멈추어버렸다. 효부골에서 10여 분쯤 걷다 보면 넓은 풍산들과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어락정이 등을 돌린 채 길손을 반기고 있다.

어락정 정면

어락정은 조선 중기의 효자 김세상(金世商, 1520~?)이 지었다. 당호(堂號) ‘어락’은 장자에 나오는 구절로 “물고기의 유유한 즐거움을 통해 무위자연의 참다운 도”를 추구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름은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지었다.

장자는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연 그대로의 흐름에 맡기는 삶을 강조했다. 이는 인간이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했다. 장자의 가르침대로 어락정에서 바라보는 강물은 어떤 장애물을 만나게 되더라도 서로 다투지 않는다. 강물은 장애물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돌아가거나 스며들며 자연스레 길을 찾아가듯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노력은 하되 자연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는 인간이 억지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것을 강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리라.

정자를 지은 김세상의 본관은 안동으로 군수를 지낸 김극신(金克信)의 아들이며, 대사간 보백당 김계행(金係行)의 손자이다. 선생의 가계도를 보면 증조부는 안동김씨 9세 김삼근으로 비안 현감을 역임하면서 세상에 명성을 얻어 안동김씨가 명문반열에 오르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아들 김계행은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대사간으로 간쟁에 힘썼으나 연산군 때에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안동으로 낙향하여 ‘보백당(寶白堂)’이라는 당호를 걸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보백당은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다섯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禮智信)에서 이름을 따 ‘극인, 극의, 극예, 극지, 극신’이라 지었다. 둘째 딸은 풍산 류자온에게 출가했고, 류자온의 증손자가 서애 류성룡이다. 이러한 가계도를 이해한다면 어락정의 이름을 서애가 명명한 것도 쉽게 이해가 된다.

어락정 배면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외아들 기량(起亮)을 어락정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구국 일념으로 왜적 토벌에 동분서주하다가 행방불명되어 몰년(沒年)을 알 수 없다. 전쟁의 참화로 주인을 잃은 어락정은 이후 퇴락하고 허물어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김세상의 후손들(안동김씨 군수공파)에 의하여 1948년 집성촌인 의성군 옥산면 실업리에 정자를 세우고 어락정이라 편액하였으나 옛 땅에 세우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오늘 찾아가는 어락정은 김세상이 처음 지은 터에 중건한 정자로 1985년 안동김씨 진사공파에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복원한 건물이다.

전통이 휘감아 흐르는 유교문화길
유교문화길 중 하회마을 코스

임란이 끝난 후인 1600년 추석을 하루 앞둔 8월 14일, 서애 류성룡은 형님 겸암과 함께 정자에 오른 소회를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정자는 화산 동쪽 산기슭 낙동강 강가에 있다. 정자의 주인은 김세상이며, 무인으로 부모에 대한 효심과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라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만년에 정자를 지어 낚시를 즐기면서 지냈는데, 내가 일찍이 정자의 이름을 ‘어락’이라 했다. 이제 그 정자를 찾았으나 주인은 간데없고, 황폐되어 잡초만 뜰 안에 가득한데, 두어 떨기 산국화만 피어 가을바람에 흔들리니, 슬픈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시 한 수를 벽에 붙여두고 간다.”

魚樂亭

孤亭猶在主人亡 외로운 정자는 의구히 섰는데 옛 주인은 간 곳이 없네
雲物蒼茫歲月荒 세상사 창망하니 거친 세월 덧없어라
秋草滿庭行逕沒 가을 풀 뜰에 차오르고 오솔길 막혔는데
一叢山菊爲誰香 한 떨기 산국화여 누굴 위해 향기를 품는가?

어락정에서 바라보는 병산과 하회마을로 흘러가는 낙동강의 물줄기가 한 폭의 그림이다.

음력 2월 초하루 ‘영등날’ 어락정을 답사하고 난 후 내친김에 병산서원을 거쳐 유교문화길을 걸어 하회마을로 들어왔다. 겨울의 끝자락이지만 아직 바람이 매섭다. 꽃샘바람이다.

꽃샘바람이 부는 이유를 잘 몰랐다
꽃피는 것을 시샘하는 심술꾼이라고 미워한 적도 있다
그런 내가 사랑의 꽃을 피웠을 때
꽃샘바람의 혹독함을 알았다
실한 꽃을 피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구순자 시인의 시 <꽃샘바람>이다. 꽃샘바람은 꽃만 실하게 피우고자 하지 않는다. 봄기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 나무들을 한껏 흔들어 나뭇가지와 뿌리를 실하게 하는 구실도 한다. 겨울잠을 깬 나무들은 꽃샘바람에 몹시 흔들리는 까닭에 뿌리를 더 넓고 깊게 뻗치면서 땅의 속살들을 꽉 껴안게 되어, 여름에 거센 태풍이 닥쳐도 끄떡없이 자란다. 마디 없는 대나무가 없듯이 갖은 풍상을 겪지 않고서는 인간다운 삶도 성숙하기 어렵다. 어락정을 답사하며 ‘어락’의 진정한 의미를 떠올려 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영등날 며느리를 데리고 내려오는 영등할매의 심술보다 더 혹독한 시련으로 허덕이고 있다. 영등날을 맞으며, 다시 깃든 봄이지만 시릴 만큼 극복하기 벅찬 시련으로 고통받는 모든 국민이 스스로 실한 삶을 꽃피우기 위해 인생의 풍상을 겪는다고 여긴다면 주어진 현실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으로 가는 유교문화길을 크게 휘감아 도는 모퉁이에
살포시 내려앉은 어락정에 춘설이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