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안동이지, 볼 안동은 아니다.
전국 최고를 자랑하는 안동이 가지고 있는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은 독창적이지만 매우 정적이다. 정적이라는 것은 활달함이 없고 정체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동을 찾는 많은 관광객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안동은 “들을 안동이지 볼 안동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영국 여왕이 다녀가고 미국의 전 대통령이 다녀가고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석학들이 다녀간 곳이어서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 실체를 들여다보기 위해 안동을 찾았지만, 막상 안동에 와보면 여느 곳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말이 나오는가, 이것은 바로 안동 문화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동 웅부공원 내에 건립된 영가헌(위)과 대동루(아래)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을 우리는 안동문화권이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느낄 수 없는 지적인 엄숙성과 전통을 지키고 가꾸어 가고자 하는 저력을 지니고 있으며, 동성마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삶의 힘을 절절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안동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의 문화와 비교해 볼 때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지역마다 소장하고 있는 지정문화재를 놓고 살펴보면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문화권과 부여와 공주를 중심으로 한 백제문화권, 조선시대의 역사유적들이 갈무리되어 있는 서울의 경우에는 관광객들이 눈으로 보고 감상할 수 있는 문화재를 지니고 있지만 안동의 경우에는 웬만해서는 그 실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안동의 문화재는 안동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이 곧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집안 방에 꽂혀 있는 문집과 문서가 문화재이고, 몇백 년을 이어온 문중과 가문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생활용품들이 문화재이다. 따라서 안동의 문화재는 박제되어 생명을 다한 것이 아니라 몇백 년을 이어 온 후손들과 같이 호흡하며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안동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지켜 가는 종가의 권위와 문중 조직들은 유교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는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전통을 지키며 오늘날까지 혈연과 지연공동체를 끈끈한 정으로 지탱하고 있다.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전통문화와 첨단 디지털 기술이 탄생시킨 박물관이다.
이와 같이 안동은 오천 년을 이어 온 우리 민족의 끈끈한 삶이 축적된 곳이며 우리 민족의 생각과 신명까지도 잘 갈무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정신문화 속에 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누구나 이곳에 오면 가장 안동다움을 볼 수 있고 가슴에 담을 수 있으며 안동 문화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발점이 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은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군청 부지 및 군청사가 빈 공간으로 남게 되었고, 이 곳의 공간 활용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몇 가지 차원에서 활용 방안이 마련되었다. 첫째, 안동의 역사적 전통과 관련된 활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 안동시민들이 가까운 곳에서 휴식할 수 있는 도심공원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며, 셋째로는 타지역에서 안동을 찾는 사람들에게 전통문화의 본고장으로서의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안동웅부관아의 중건이었다.
역사적으로 이 군청 부지는 안동대도호부의 치소(治所)로 사용되었으며 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안동 군청이 있을 때까지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부근에 있는 검찰청과 법원이 강남의 택지개발지구로 이주가 예정되어 있어 과거 안동대도호부로서의 권위를 재현할 수 있는 공간 확보는 충분하였다. 이에 도심 테마공원 조성사업으로 이 일대에 대한 정비사업이 시작되었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안동관아의 중건이었다. 그러나 도호부의 각종 건물 전체를 중건한다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어, 관아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것에서 동헌과 문루만 복원하여 안동웅부의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테마공원으로서의 조성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에 여러 차례의 회의와 전국 유명지역의 관아건물 답사를 통하여 동헌 건물의 규모와 형태를 정하였다. 과거 동헌 자리로 추정되는 현 위치에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기와 건물로 동헌을 복원하여 행정 중심지로서의 권위를 가질 수 있도록 설계 및 시공하여, 2001년 11월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문루는 동헌 전면에 2층 누각 형태의 문루를 설계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도심 테마공원 조성계획의 나머지 부분은 안동웅부 대종 설치와 인근 부지 매입 그리고 조경공사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안동웅부 대종은 시민 성금 모금으로 세우기로 했고, 인근 부지 매입도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군청 부지 내의 현대식 건물을 모두 철거하여 명실공히 전통문화를 재현하고 도심 테마공원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부신목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에 고을원이 신목에 제사를
올리는 전통은 수백년을 이어 오고 있다.
안동웅부 동헌중건사업은 안동관아 건물을 복원하는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새로운 안동의 전통을 이루는 출발점을 의미하는 것에 더 큰 상징성이 있다. 이곳이 안동을 찾는 관광객에게 안동의 역사적 유구성을 상징하는 장소로 기억되길 바라고 안동 관광의 출발점이 되길 기원했다. 그러나 더욱 간절히 바라는 점은 이곳 동헌에서 다양한 문화 행사가 이루어져서 안동 문화를 살찌우는 의미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 이곳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현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전국 유림 회의가 개최되는 곳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국악단이나 교향악단의 공연장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화 활동의 공간,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열기를 발산하는 장소로 활용될 수도 있다. 남녀노소가 모여서 안동 문화를 노래하고 미래를 향한 안동인의 의지를 모으는 장소가 되기를 소원했다. 이렇듯 이곳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새천년의 역사를 만들어갈 역사적인 장소가 되길 소망하며 추진되었다.
안동 읍성(安東邑城)의 흔적을 찾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380년(무왕 6년)에 시축(始築)하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정희적(鄭熙績)의 보축(補築)이 있었으며 1605년 대홍수로 폐성이 된 성을 순찰사(巡察使) 유영순(柳永詢)이 수축(修築)하였다. 안동의 향토지인 영가지(永嘉誌)의 기록을 보면, 안동 읍성은 타원형 평지성(平址城)으로 둘레 2,947척, 높이 8척, 동, 서, 남, 북에 문루(門樓)가 있고 남문 앞은 늪지대, 동문은 철문, 북문과 서문 앞에는 성문 공격을 방어하는 토성인 옹성(甕城)이 있었으니, 영가지에는 안막곡조산(安東谷造山), 삼가조산(三街造山)이라 기록하고 있다. 성내에는 중심 지점에 전투를 지휘하는 높은 대가 3곳에 있었으니, 영가지에는 성내조산(城內造山)이라 하고 3대가 있던 곳을 현재 삼산동(三山洞)이라 한다. 또 성내에는 우물 18개소, 못 5군데, 관아, 군창 등 관아 건물만이 있었고 천리천(영가지에는 安東谷渠)이 북문 동쪽(현재 안동 의료원)에서 성 가운데를 관통하여 남문 동쪽(현재 남문로 동편)으로 흐르고 있었다.
안동의 향토지인 영가지에 실려 있는 본부도이다.
안동도호부 도성과 영남산, 법흥사, 임청각, 법림사, 영호루의 위치가 잘 그려져 있다.
안동읍성은 1605년 수축 이후 2차에 걸친 큰 증축이 있었으나 증축배경 증축연대를 기록한 문헌은 없고 증축한 사실만 확인할 수 있는 지도와 문헌을 통해 증축의 과정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ㆍ1차 증축
안동부 여지지의 부도와 기록 내용을 영가지와 비교하면 성곽의 크기와 형태의 변화는 없으나 성 둘레에 해자(垓字)를 설치한 성지읍성(城址邑城)으로 증축되어 있다. 영가지의 본부도에서 성중을 관통하던 천리천의 수로를 현재의 안동의료원 뒤쪽에서 북문, 서문, 남문 앞을 통과하는 반원형으로 개축하고 또한 수로가 직강이던 안동동부초등학교 동편 개울을 동문 앞으로 돌려 남문 앞에서 천리천과 연결해 평상시에는 물이 흐르게 하고, 비상시 물을 담을 수 있도록 하였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지금도 현장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천리천의 수로(안동의료원 뒤쪽→천리교 남쪽 50m 지점까지)가 궁형이고, 동부초등학교 동편 개울의 수로(신흥동사무소 뒤쪽→영덕행도로까지)가 인위적으로 축조되어 있다. 또한 2차 증축 시 확대 증축에서 제의된 동문에서 남문까지의 실향을 1898년에 편찬된 안동부읍지에 「……동문에서 남문까지 작은 호가 있어 수시로 물을 담고 물을 뺄 수 있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해지 읍성임을 입증하고 있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는 ‘안동웅부’ 현판, 안동군청사에 걸려 있다가 안동시, 군이
통합되면서 시청사에 걸려 있다가 지금은 안동시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ㆍ2차 증축
여지도서(與址圖書)의 안동부지도(安東府址圖),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안동부읍지(安東府邑址) 등을 비교·분석해 보면 성곽의 동, 남, 북문 쪽은 변동이 없으나 서문 쪽은 확대 증축되어 목성산까지 성내로 포함하고 있는 평산성(平山城)으로 증축되어 있다. 해자(현 천리천) 동편에 있던 서문은 해자 서편(구 교육구청 앞쪽)으로 옮겨 세워지고 해자로 축조한 천리천의 수로는 해자가 아닌 하천으로 성내의 서쪽 편을 관통하고 있다. 그러나 동문에서 남문까지의 해자는 남아 있었으니 1898년(고종 35년)에 편찬된 안동부읍지에는 ‘석축 둘레 4,425보, 높이 8척, 여첩 8,841에 동, 서, 남, 북에 문루가 있고 동문에서 남문까지 작은 해자가 있어 수시로 물을 담고 물을 뺄 수 있게 했으며 성내에는 우물이 18개소, 못이 한군데 있고, 작은 개울이 부의 북쪽 5리쯤에 있는 범씨동에서 발원하여 성중을 관통하여 남강으로 흘러들어 간다’라고 전하고 있다.
2차 증축은 여지도서의 내용과 안동부지지도(安東府之地圖)를 비교 검토하면 영조(英祖) 때 증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 읍성의 성문과 문루들은 1919년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천리천 수로에서 해자의 흔적만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동문은 동문 로타리와 세무서 중간 지점에 있었고, 남문은 단위조합 앞쪽 북문은 북문교 남쪽 30m 지점, 서문은 2차 증축 이전에는 서문교 동편 10m, 2차 증축 이후 서문교 서쪽 50m 지점(구 교육구청 앞)에 있었다. 안동 읍성은 오래된 성으로 역사적, 사회적, 자연적 시대적 조건에 따라 규모와 형식 구조가 변천해 오다가 시대적 조건에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
안동관아(安東官衙)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관들이 정무를 집행하던 건물이다. 지방관아는 중앙에 담과 정문을 내어 각종 집무실과 창고를 두고 주변에는 객사 또는 향교 등 부속건물을 둔다. 정문 안에 다시 담을 둘러 수령이 직접 공무를 수행하는 외아(外衙)와 수령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내아(內衙)를 두고 외·내아는 다시 담이나 행랑으로 구분한다.
동헌이란 명칭은 외아가 내아의 동쪽에 있는 데서 연유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동헌이 그냥 관아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 외동헌, 내동헌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동헌의 구조와 크기는 군현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전체적인 구성은 유사하다. 보통 정면 6~7칸, 측면 3~4칸 건물로 전체 평수는 40~50평 정도이다. 동쪽에 대청을 두고 서쪽에 온돌방과 다락을 둔다. 방의 앞에 툇마루, 뒤에 누마루와 광을 낸다. 내아와는 담이나 행랑을 내어 구분한다. 대체로 외아는 상류 가옥의 사랑채, 내아는 안채 구조와 비슷하다.
영가헌(永嘉軒)
안동부의 관아는 안동 부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관아는 고을원이 집무를 보는 곳으로 안동 관아는 구 군청이 자리 잡고 있던 곳과 거의 일치한다. 바로 웅부공원이 조성된 곳이다. 고을원이 근무하던 건물을 주로 동헌(외동헌, 외아)이라 이름 붙여졌다. 영가헌은 바로 고을원이 근무하던 동헌을 재현해 놓은 건물이다.
‘영가’라는 당호는 안동의 옛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 영가는 길 영(永)자에 아름다울 가(嘉)자를 쓰는데, 여기서 길 영자는 두 개의 물줄기를 뜻한다. 그러므로 길 영자는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형국을 본뜬 글자이다. 즉 낙동강의 본류와 반변천이 시내 중심에서 합쳐지는 형국에서 본뜬 것으로 이 두 줄기의 물줄기가 합쳐져서 흐르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대동루(大東樓)
옛 안동관아 내에 있던 누각을 재현한 건물로 옛 이름은 관풍루이다. 관풍루를 지은 계기에 대해서는 김수온(金守溫)의 기문에 잘 드러나 있다. 기문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이 도적을 피하여 남으로 행하셨는데 이 읍에다 말을 감추고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능히 서울을 회복하고 가마가 돌아갔다. 큰 계책으로 여기에서 운명을 결정하고 능히 대동(大東)을 회복하고 편안히 하였다. 고로 안동(安東)이라 이름을 하사하고 대도호(大都護)로 승격시켜서 영남 여러 읍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이로부터 부의 드러난 성(姓)과 대족(大族)이 중외(中外)에 꽃부리를 날리고 위(位)가 장수와 재상에 이른 자가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니, 인물과 토산품의 성대함이 또한 다른 읍이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객사의 동쪽에는 누가 있어 다섯 칸이었는데 이름하여 덕민루(德民樓)라 하였다. 신묘년(1479) 횃불 맡은 사람이 실화하여 하룻저녁에 다 태워버리고 말았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부민들이 누가 없어서 부의 사람들이 민망히 여겼는데 뜻을 모아 객사 대문 바깥에 누 다섯 칸을 일으키니 몇 달도 되지 않아 큰 집이 날아갈 듯한 건물을 다시 세우고 관풍루라 편액 했다. 경자년(1540)에 부사 김광철(金光轍)이 중수하였고, 병자년(1576)에 불이 났다.
지금의 대동루는 바로 관풍루의 옛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써 당호를 대동이라 지은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된 것은 안동 고창전투의 승리에서 기인했고, 안동의 삼태사와 부민들의 합심 덕분에 고창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기에 능히 동국을 안정시켜준 고을이라는 뜻이 담긴 “능안동국(能安東國)”이란 네 글자를 하사하니 이 글에서 안동을 취하여 지명을 안동으로 바꾸게 되었으며. 또 ‘능안동국’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대동을 편안케 해 준 곳이란 뜻이 담긴 “안어대동(安於大東)”에서 대동이란 당호를 취한 것이다.
웅부공원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느낀 것은 안동은 뭔가 가슴 벅찬 감동으로 와닿는 그리움이 가득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동에는 지난날 잊혔던 그리움이 있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부대낌이 있는 곳이다.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는 삶의 끈적함으로 가슴 벅찬 곳이기도 하다.
또 안동은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교만하지 않고 위세를 부리지도 않는 선비의 올곧음! 안동으로의 여행은 선비의 흐트러지지 않은 마음과 삶에 대한 여유와 풍류를 느낄 수 있다. 스스로 자기를 기만하지 않는 무자기(毋自欺)를 통해 "나를 바로 잡아 세상을 바로 잡는" 선비의 대쪽 같은 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나아가 안동은 자연과 교감하는 세계관을 느낄 수 있다.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부대낌을 통해 더 나은 자아를 성취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천 년 삶이 축적된 문화가 간직된 곳! 민속문화, 불교문화, 유교문화로 이어지는 다양한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 안동은 한국을 들여다보는 창이며,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거울과 같은 곳이다.
여행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 했다. 좋은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동은 삶의 활력이 되고 그 여운은 오래오래 여러분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안동이 지닌 문화의 다양성과 전통적인 삶의 역동성은 오 천년을 이어온 우리 역사를 갈무리하고 있으며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창으로 존재하여 안동을 들여다보는 것은 곧 한국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영국 여왕이 안동을 찾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