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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고 내 분수 지키니 참으로 아무 일 없는데, 상봉정翔鳳亭
 


하회마을을 찾은 사람들이 충효당을 지나 강가에 이르러 만송정 솔숲이 보이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면 왼편으로 고목이 되어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를 마주한다. 이곳에서 강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기면 나지막한 언덕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정자가 보이는데 이 건물이 상봉정이다. 상봉정을 품고 있는 언덕은 하회구곡의 제3곡인 수림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노을이 질 무렵의 수림은 주위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수림낙화의 장관을 연출한다. 병산서원 앞을 유유히 흘러온 화천(花川)은 상봉정이 있는 서애(西厓)에서 크게 휘감아 돌아 겸암정으로 내달린다. 서애는 ‘서쪽 언덕’이란 뜻이다. 류성룡 선생은 고향에 머물 때면 늘 이곳으로 넘어가는 저녁노을을 즐겼다고 한다. 서쪽으로 지는 해가 너무나 아름다워 선생은 자신의 호를 서쪽 언덕이란 의미를 지닌 ‘서애’라 자호(自號) 한 것만 봐도 서쪽 언덕으로 해지는 풍광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수림에 살포시 내려앉은 상봉정이다
노을이 질 무렵의 수림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수림낙화의 장관을 연출한다.

 

선생은 자기가 좋아하는 서애가 ‘봉황이 날개를 펴고 빙글빙글 날아오르는’ 형국을 닮아 ‘상봉대’라 이름하고 대 위에 정자를 지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형님인 겸암 류운룡의 증손자인 회당(悔堂) 류세철(柳世哲, 1627~1681)이 도학(道學)을 강론하기 위해 임인년(현종3, 1662)에 이곳에 정자를 짓고 ‘상봉정’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류세철의 증손자인 양진당(養眞堂) 류영(柳泳, 1687~1761)에 의하여 중수되었으나 1755년의 대홍수로 모두 쓸려나가 유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건물은 그 후 중건되었으나 중건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중건기를 쓴 류일춘(柳一春)의 생몰 연대와 관련지어 짐작해 보면 대략 1700년대 후반에서 1810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상봉정 정면 / 상봉정 배면


회당은 하회마을 건너편에 있는 정자에 내왕하기 위해 강가에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해 두고 자주 이곳을 찾았다. 선생이 상봉정을 짓고 자연과 벗 삼으며 유유자적한 모습은 그가 지은 「안분(安分)」이란 시에 잘 드러나 있다.

 

汨汨人皆口腹營 / 세상살이 골몰하는 저 사람들 구복(口腹)을 채우려 노력하고
滔滔榮辱送平生 / 세상 가득한 영욕 때문에 평생을 보내는구나
杜門安分眞無事 / 문 닫고 내 분수 지키나니 참으로 아무 일 없는데
心裏昭昭此理明 / 깨끗한 이내 마음엔 이 이(理)자만 밝게 빛나는 것을

『회당집』 권1

 

산태극수태극의 명당인 하회마을의 지세를 조망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용대에 올라 하회마을을 내려다본다. 그런데 상봉정에 올라 하회마을을 바라보면 부용대에서 하회를 바라보는 풍광과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부용대에서 바라보면 왼편으로 마을의 주산인 화산이 저만치 우뚝 솟아 있고, 병산서원을 거쳐 흘러내리는 화천의 물길이 마을을 온전히 감싸고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상봉정에 올라 마을을 조망하면, 오른쪽으로는 병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길이 마을을 감싸안고 들어오는 풍경이, 정면으로는 우뚝한 화산과 강가의 백사장이 완연하다. 왼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깎아지른 부용대 절벽과 푸른 만송정 솔숲 사이를 돌아나가는 물길이 한없이 정겹다. 또한 이곳에서 바라보는 선유줄불놀이의 화려한 낙화놀이는 또 다른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이처럼 상봉정은 부용대와 더불어 하회마을을 잘 조망할 수 있는 멋진 장소이지만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숨어 있는 곳이다. 서애 류성룡은 상봉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있다.

 

상봉정에서 바라보는 하회마을과 부용대

 

「서애에 유람하며 옛일이 생각나서(遊西厓感舊)」

翔鳳今名好 / 상봉이란 새 이름도 좋을시고
緣崖舊路橫 / 벼랑 따라 옛길이 비스듬하구나
藏修曾有約 / 이곳에 살리라 일찍이 약속했거니
山水尙含情 / 산과 물은 아직도 나를 반기는 듯
石古孤松老 / 오랜 바위라 외로운 소나무 늙었고
江空片月明 / 텅 빈 강이라 조각달만 밝았어라
少年陪杖屨 / 내 어릴 적 아버님 뫼시고 이곳에 왔었지
追憶淚沾纓 / 그 생각으로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서애집』 권2

 

이 시는 이름이 바뀐 서애를 다시 찾아 옛날을 추억하는 내용이다. 조선 최고의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추앙받는 서애는 줄곧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오로지 아름다운 고향에 정자를 짓고 머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님과 학문을 논하며 유유자적하려는 로망으로 가득했지만, 세상이 그를 가만히 고향에 머물러 있게 두지 않았다.

 

이 시가 지어진 것은 1571년(선조4) 선생의 나이 30세 때이다. 한 해 전인 1570년에 스승인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서애를 보고 ‘이 아이는 하늘이 내렸다’고 할 만큼 선생의 자질을 아꼈다. 이해 3월 예안에서 선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가슴으로 애통해하며 보내드리고 병조좌랑에 임명된다. 그러나 불행은 이어진다.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종숙부 귀촌 류경심이 6월에 객지인 장단 땅에서 세상을 뜬 것이다. 객지인 장단 땅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해 겨울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서애(西厓)에다 정자를 짓고자 했으나 땅이 좁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얻은 게 있다면 ‘서애(西厓)’라는 아호(雅號)이다.

 

외롭게 자란 노송과 오래된 바위가 있는 서애는 마을에서 강 건너로 바라보아야만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더 소담스럽다.

 

하회마을에서 바라보는 수림(서애, 상봉대)과 상봉정은 단아한 모습이다.

 

졸재 류원지의 하회 16경 중 8경을 노래한 도잔행인(道棧行人)은 바로 상봉정 가파른 비탈길을 지나가는 행인을 그리고 있다. 마을에서 보면 그 가파른 비탈길을 지나는 행인이 구경거리가 될 정도로 그 풍광이 뛰어났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잔행인에 관해 1734년 양계산인(陽溪散人) 이복(李馥, 1626∼1688)이 쓴 시를 보면 비탈길을 오가는 행인의 모습을 그림처럼 그려내고 있다.

 

잔도가 마을 외곽에 매달려 있어
똑똑히 행인을 헤아릴 수 있구나.
가는 곳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왕래하는 사람 꾸준히 보이네.
가랑비 오면 도롱이 걸친 사람,
석양엔 땔감 진 사람도 가네.
길 가파르니 어깨 쉴 겨를 없고
강이 그윽하여 길 묻는 이도 드물구나.
조용히 앉아서 바쁘고 한가함을 견주어보니
도모함 없는 것이 곧 몸을 평안히 함이로다.

- 이복

 

이처럼 멋진 풍광 속을 오가는 행인의 모습은 찾을 길없다. 하회마을에서 상봉정 쪽을 바라보아도 옛 도잔행인의 풍광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가파른 비탈이었을 자리에 양수장이 자리 잡고, 그 위로는 지방도가 지나기 때문이다.

 

상봉정에서 바라보는 선유줄불놀이의 장관은
번잡한 마을에서 보는 것보다 또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다.
(사진 안동대학교 건축학과 정연상교수 제공)

 

하회마을의 서쪽 언덕(서애)로 넘어가는 해, 저녁놀이 질 무렵의
서애는 온통 붉은 빛으로 수림낙화를 연출한다.
(사진 안동대학교 건축학과 정연상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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