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변을 흐르는 바람은 언제나 서늘한 역사의 기운을 품고 있다. 구 안동역을 지나 법흥교 아래에 다다르면, 시선은 자연스레 바닥에서 떨어지지 못한 채 땅 위에 굳어버린 짧은 레일 한 도막에 머물게 된다. 붉게 부식된 녹슨 레일은, 퇴색된 세월이 남겨놓은 아픈 지문이자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아픈 서시다. 이는 우리가 절대로 망각하지 말아야 할 그날의 수모를 기록한 대지의 문장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임청각(臨淸閣) 앞마당을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로지르며 조선의 허리를 끊어놓았던 옛 중앙선 기찻길의 마지막 파편이다. 무려 78년이라는 유구한 세월 동안, 이 철길은 일제의 서슬 퍼런 칼날이 되어 한 가문의 정기를 무참히 짓밟고 민족의 자존심을 어두운 방음벽 뒤로 유폐시켰다. 철마가 내뿜는 굉음과 진동은 고택의 기둥을 뒤흔들었고, 마당을 채우던 선비들의 시문 소리를 지워버렸다.
2021년, 마침내 방음벽이 철거되고 레일이 걷히면서 고택은 비로소 오랜 독백을 끝내고 숨을 쉬게 되었다. 그 서슬 퍼런 족쇄를 풀어내니, 비로소 임청각을 둘러싼 나지막한 담장이 편안하고 정겹게 눈에 들어온다. 담장 너머로 길게 이어진 행랑채는 한때 대부호 가문이었던 고성 이씨 종가의 굳건한 위엄과 내력을 대변하는 듯하다.
새롭게 단장한 솟을대문은 오랫동안 걸어 잠갔던 문고리를 활짝 풀고, 찾아오는 이들을 따스하게 맞이한다. 뒤편에는 영남산(嶺南山)의 부드러운 능선이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게 집을 감싸 안고, 정면에는 하늘을 투영하며 머문 듯 흘러가는 맑은 낙동강이 흘러간다. 수려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자리의 임청각은 가문 전체가 구국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생가다.
‘임청각’이라는 가옥의 이름에는 은거하는 선비의 숭고한 정신세계와 자연을 대하는 겸양의 미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국 진나라의 대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명작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라는 시구에서 ‘임(臨)’ 자와 ‘청(淸)’ 자를 따와 명명한 것이다.
'뜻을 잃은 시대에 권력을 탐하기보다 맑은 시냇가에 임해 스스로 탐욕을 씻어내고자 했던 선조들의 올곧은 기상이 이름 속에서 살아 숨 쉰다. 군자의 맑은 인성을 닮은 듯 단아하면서도 뼈대가 살아 있는 현판의 글씨는 영남 유학의 거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친필로 고택이 지닌 문화적 가치와 영남 남인의 정신적 뿌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리라.
임청각의 역사는 조선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고성 이씨 이증(李曾) 선생이 안동 법흥동에 터를 잡고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아들인 형조좌랑 이명(李洺) 선생 대에 이르러 중종 14년인 1519년에 비로소 건립되었다. 약 500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품은 이 고택은 고성 이씨 종택으로서의 상징성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 한 말의 대격변,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의 수난을 온몸으로 견뎌낸 역사적 무게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 거대한 목조 건축의 결정체는 별당과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 그리고 사당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우주를 이룬다. 하늘에서 이 집의 배치를 내려다보면, 해(日)와 달(月)의 형상이 조화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쓸 용(用)자 형의 독특한 평면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내부 구조는 유교적 사회 질서 속에서 남녀의 생활 공간을 엄격히 분리하면서도, 동시에 위계질서에 따른 동선과 바람의 소통을 세심하게 배려한 조선 사대부 주거 문화의 정수다.
중심 건물이자 대표적인 별당인 군자정(君子亭)은 정(丁)자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조형미를 뽐낸다. 기단 위에 우뚝 솟은 군자정은 단단한 화강암 돌층계를 일곱 계단 이상 엄숙하게 걸어 올라가야만 마루에 닿을 수 있다. 공간의 위계를 높여 절로 경외심을 갖게 만드는 건축적 장치다. 군자정 바로 옆에는 사각 연못이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조경을 위한 미적 요소이기도 했으나, 목조 건물의 최대 적인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방화수(防火水)의 실용적 역할이 컸다. 사랑채 마당에는 투박한 막돌을 쌓아 올린 옛 우물이 정겨운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외부의 시선을 완벽히 차단하는 전형적인 미음(ㅁ) 자형 구조의 안채가 나타나 조선 반가의 내밀한 일상을 입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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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의 안채는 특별한 구조를 가졌다. 외부 즉 바깥 행랑 마당에서 안마당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몇 개의 마당과 문을 거쳐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여성의 생활 공간으로 독립성과 프라이버시를 완벽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어디까지나 유교적인 공간 배치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정면 안채 끝자락에서 올려다본 푸른 하늘이 해맑게 다가온다. 안채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처마를 덮은 기와지붕은 특이한 액자 구성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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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군자정 가장 오른편 위쪽 언덕, 나지막한 담장 안에 깊숙이 자리한 사당(祠堂)의 문을 여는 순간, 묵직한 먹먹함이 밀려든다. 이 신성한 공간에 마땅히 종가의 핵심이자 영혼이어야 할 조상의 위패, 즉 4대 불천위(不遷位)가 없다. 하지만 적막한 빈 제단이야말로 임청각이 가진 가장 위대한 정신의 증거이자, 이 고택이 세상 그 어떤 화려한 궁궐보다 위대해 보이는 이유다.
"나라를 빼앗겨 백성이 남의 나라 종이 되게 생겼는데,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가문의 명맥을 잇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없고, 조상도 없다.”
석주 이상룡 선생이 1911년 차가운 만주 황무지로 망명길에 오르기 전날 밤, 선생은 사당으로 올라가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으며 신주를 없앴다. 가문의 제사와 효(孝)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온 영남의 유학자이자 종손으로서, 자신의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참혹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충(忠)이 없는 효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엄중하고 비장한 결단. 이 텅 빈 제단은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픔을 온몸으로 안고 투쟁의 길로 나섰던 대 지식인의 의지를 역설적으로 대변하며, 그 어떤 화려한 신주보다 더 강렬한 영적 울림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일제 치하에서 양반이라는 기득권을 누리며 편안히 살 수 있었던 삶을 단호히 거부했던 석주 선생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증명해 낸 선각자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완전히 강탈당하자, 선생은 망명을 결심하고 가장 먼저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노비 문서들을 마당에 모아 불태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완전한 신분 해방과 자유를 선포했다. 인간 평등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지도자의 숭고한 성정에 깊이 감동한 노비 중 일부는, 해방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만주로 향하는 이상룡 선생의 고난 가득한 망명길을 자처하여 평생의 동반자로 함께 나아갔다.
선생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격동의 삶을 날카로운 역사의식으로 통찰한 문집 『석주유고(石洲遺稿)』를 남겼다. 특히 사랑채 천장에 걸린 선생의 한시 「거국음(去國吟)」은 정든 고향과 500년 종택 임청각을 뒤로하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야만 했던 망명자의 비장한 각오와 끓어오르는 대의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강산
선비의 의관 예의 오백 년 지켜왔네
그 무슨 문명이 노회한 적 불러들여
꿈결에 느닷없이 온전한 나라 깨뜨리나
이 땅에 적의 그물 쳐진 것을 보았으니
어찌 대장부가 제 한 몸을 아끼랴
잘 있거라 고향 동산 슬퍼하지 말아라
태평한 그날이 오면 돌아와 머물리라
망명객의 깊은 비애는 항일 투쟁을 향해 불타는 신념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은 서간도의 척박한 황무지에서 동포들을 모아 자치 단체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고, 임청각을 매각한 자금과 전 재산을 털어 최초의 한인 무장 독립군 양성 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로 이후 수많은 항일 영웅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이다. 선생은 그렇게 독립군의 총칼이 되어 일제의 심장을 겨누었다.
가문의 헌신과 숨은 영웅들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임청각은 단지 한 개인의 독립운동이 아니었다. 가문 전체가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의 요람이자 독립운동의 터전이 되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을 필두로 그의 친동생인 이봉희, 이상동 선생, 아들 이준형 선생, 그리고 손자 이병화 선생에 이르기까지 일가친척 수십 명이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다. 그중 11명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하나의 명문가에서 이토록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고 3대에 걸쳐 전 재산과 목숨을 바친 사례는 한국사를 넘어 세계 역사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고귀한 서사다.
또한, 우리는 남성들이 만주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총을 들고 싸울 때,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생계를 책임지고 후방을 굳건히 지켜내야 했던 임청각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위대한 희생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석주 선생의 부인인 종부 김우락 여사, 며느리 이중숙 여사, 그리고 19대 손부였던 허은 여사에 이르기까지, 안사람들 역시 3대에 걸쳐 만주의 낯선 땅에서 모진 고난을 고스란히 분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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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손부 허은 여사가 남긴 생생한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는 옥수수죽으로 연명하면서도 항일 전사들의 군복을 짓고,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을 대접하며 후방을 지켜낸 강인했던 여성들의 눈물겨운 기록이다. 참고로 허은 여사는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선생의 어머니인 허길 여사의 고모이기도 하다. 이처럼 임청각의 서사는 남성과 여성, 가문과 가문이 독립이라는 거대한 대의 속에서 어떻게 하나의 유기체처럼 엮여 헌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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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임청각은 단순한 고택이 아니라, 반드시 말살하고 파괴해야 할 불온한 항일 사상의 근거지이자 눈엣가시였다. 이에 일제는 임청각의 정기를 끊기 위해, 철로의 궤적을 억지로 뒤틀어 고택의 마당 한복판을 관통하는 기형적인 중앙선 노선을 깔아버린 만행을 저질렀다.
이 악독한 보복성 만행으로 인해 조선 사대부 건축의 자부심이었던 99칸의 대저택은 처참하게 반 토막이 났고, 사당 앞을 가로막던 행랑채와 많은 부속 건물이 철거되어 지금의 50여 칸 남짓한 상처 입은 모습만 남게 되었다. 임청각은 그렇게 7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안마당을 울리는 철마의 거대한 굉음과 땅을 뒤흔드는 진동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민족의 수모를 묵묵히 버텨내야 했다.
길고 어두웠던 유폐된 침묵의 세월이 지나고, 임청각의 앞마당을 무겁게 짓누르던 철마의 흔적은 대대적인 복원 사업을 위해 완전히 걷혔다. 오랜 세월 거대한 방음벽의 그늘 속에 갇혀 있던 고택의 구석구석에는 비로소 빛나는 햇살이 깊숙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잘렸던 가옥들의 뼈대가 고증을 통해 복원되기 시작했고, 입구의 담장과 주변 산책로가 단정하게 정비되었다. 고택 뒤편 영남산 자락에 마련된 산책길에 오르면, 아래로 푸르게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와 용상동과 정하동의 전경이 한눈에 시원하게 와 닿는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복원을 넘어, 잃어버렸던 민족의 기상과 정의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역사적 치유다.
임청각 옆에 역사문화공원과 함께 들어선 역사교육관 역시 과거의 박제된 유적지를 넘어 오늘날 살아 숨 쉬는 역사교육의 거점으로 새롭게 변모했다. 공원 한쪽에는 강인하고 인자한 풍모로 낙동강을 고요히 굽어보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동상 아래 표지석은 읽는 이로 하여금 큰 울림을 준다. 가문 전체가 걸어온 눈물과 영광의 독립운동 대서사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이제 다양한 문화 예술 행사와 역사 체험을 위한 프로그램이 개최준비를 마쳤으며, 미래 세대들이 선조들의 역사를 지루한 활자가 아닌 친근한 삶의 문화 공간으로 접할 수 있도록 가교 구실을 할 것이다.
영남산의 깊은 자락에서 불어오는 서늘하고도 맑은 바람을 맞으며, 500년 고택의 빛바랜 툇마루에 가만히 앉아 본다. 눈을 감으면 당장이라도 저 멀리 만주벌판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던 석주 선생의 마른기침 소리와, 어둑한 밤 독립군들의 옷을 짓던 여인들의 바느질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올 법도 하다.
임청각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국가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평화와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희생과 피의 토대 위에서 피어난 꽃인지를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가문의 안위와 세속의 부귀영화를 아낌없이 내려놓고, 오직 조국의 주권 회복과 민족의 내일을 위해 만주 황무지의 칼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임청각 사람들.
그들이 남긴 숭고한 넋과 고귀한 희생정신은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와 미래 후손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구국의 푸른 불꽃이 되어 세세토록 살아 숨 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