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더위의 매서움이 온대지를 불태우고 있다. 붉게 물든 배롱나무 위로 태양빛이 작렬하고 폭염에 바람마저 길을 잃고 뜨거운 숨을 토해내고 있다. 매미 소리마저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날, 그동안 답사를 아껴두었던 반구정(伴鷗亭)을 찾았다. 낙천과 동천의 물길이 합쳐지는 곳, 정상동의 한적한 길목에 서면 벼슬길의 미련마저 하얗게 비워낸 고즈넉한 한옥 한 채가 반긴다. 바로 고성이씨 가문의 기품과 은일(隱逸)의 매력이 아늑하게 스며있는 반구정이다.
안동의 정자는 안동 지역의 문화적 특성이 반영되어 정자의 실질적 기능과 의미가 상당히 변화하면서도 매우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었다. 정자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교유와 풍류 혹은 휴식을 위한 공간이라는 일반적 특징만 가지고 들여다본다면 안동의 정자문화를 이해하는데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특히 안동지방의 정자는 지역의 다양한 문화정체성을 보듬어내며 그 기능이 확대 재생산되기도 하는데, 이번 호에 답사하는 반구정은 안동에 있는 정자의 다양한 특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전형을 보여주는 정자다. 반구정의 이러한 특징을 살피는 데는 두 가지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바로 이웃에 있는 귀래정과의 관련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종악(李宗岳)과 이상경(李尙慶)이 주도해서 만든 고성이씨 임청각파의 문회계이다.
반구정을 세운 이굉(李肱)은 임청각을 세운 이명(李洺)의 아들이며 귀래정을 지은 이굉(李浤)의 조카다. 고성이씨의 안동 정착은 이증(李增)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실질적으로 뿌리내린 것은 이굉, 이명 형제다. 특히 귀래정을 지은 이굉은 안동을 자연회귀적 삶의 근거지로 삼았던 데서 이들의 정착이 확고하게 되었고, 이 집안의 가풍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 집안의 가풍은 가능하다면 관료로 진출하는 유가적 삶보다는 순수한 자연적 삶을 더 중시하는 방향을 가졌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처사적 삶을 지향하는 퇴계의 학풍과 일정한 밀착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성리학의 지역화와 토착화에 성공한 퇴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안동에서는 도가적인 자연회귀적 삶만을 지향할 수는 없었다. 비록 관료로 진출하고자 하지 않아도 성리학적 도덕의 함양과 성리학적 지식의 학습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안동에 정착하면서 자연회귀적 삶을 지향하고자 했던 이 집안의 가풍은 고성이씨들이 초기부터 안동 부근에서 가장 좋은 경관을 차지하고 가장 아름답고 멋진 정자를 가지게 된 근본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귀래정, 군자정, 반구정, 북정, 어은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반구정은 정자의 일바적인 공간구성을 깨고 좌우에 동재와 서재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반구'라는 당호는 "물가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갈매기를 벗 삼는다"는 절묘하고도 낭만적인 뜻이 담겨 있다. 반구옹 이굉이 ‘반구(伴鷗)’를 정자 이름으로 취한 것은 ‘귀래’라는 이름보다 훨씬 더 자연회귀적 삶 속에 정착했음을 나타낸다. ‘귀래’라는 단어에는 세속적 삶으로부터 ‘벗어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갈매기와 짝하고 있는(반구)’ 것은 이미 자연 안에 소요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반구옹(伴鷗翁) 이굉은 복잡한 세속의 부귀영화와 벼슬자리를 미련없이 내려놓고 이곳 강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세월의 흐름에 맞춰 강물을 바라보며 마음에 평온을 지을 정자를 세웠다. 담장 안에 깃든 학문의 여운과 낮은 방형 토담 안으로 들어서면 정갈한 뜨락을 중심으로 고풍스러운 정자와 동·서재가 가지런히 맞물려 있다. 정자 마루에 앉아 눈을 감으면 강바람이 마루 틈 사이로 실려 와 옛 선비들이 읊조리던 시회(詩會)의 낭랑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뜰 한쪽 비각 아래에는 삼대의 높고 정결한 뜻을 기리는 ‘고성이씨삼세유허비(固城李氏三世遺墟碑)'가 세월을 견디며 오롯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깊은 숲속 그늘처럼 조용히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삼세라 함은 아버지 이명과 반구옹 그리고 반구옹의 아들인 어은(漁隱) 이용(李容)을 말하며 이들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이곳에 돌아와 은거하니 삼세(三世)가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장소가 되었다. 후세에 이를 기념하여 ‘고성이씨삼세유허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반구정의 초창은 1530년대 초기로 추정된다. 당시 안동 유림에서는 이 반구정에서 시회와 향회를 자주 열어 많은 선비가 출입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정자는 문중 자제를 위한 교육공간이 되어 동재와 서재, 장판각, 주사까지 건축하며 서원의 강학 공간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1700년(숙종 26)에는 임청각을 지은 아버지 이명과 아들 이굉 그리고 손자인 이용(李容)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빈터만 있었던 것을 1740년(영조 16)에 이굉의 7대손 이시항(李時沆)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수되었으며, 1945년 화재로 정자가 소실되어 1946년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재사는 1905년에 중건된 것이다. 정자 내부에는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 · 퇴계(退溪) 이황(李滉) ·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등 제현들의 시판이 게판되어 있다.
반구정은 초기에 자연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 잡아 교유와 풍류를 위한 공간으로서 일반적인 정자의 기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는 이 지역 고성이씨 자제를 위한 교육공간으로서 문중 서원의 역할로 바뀌게 된다. 정자 앞에 동재와 서재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점이 바로 반구정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동재와 서재는 동일한 평면 형태를 가지는데, 전면이 개방된 1칸 마루와 2칸의 온돌방으로 꾸몄다. 온돌방 정면의 쌍여닫이창은 가운데 설주가 세워진 영쌍창인데, 가운데 설주는 부재의 앞부분을 절반으로 잘라내어 쌍창을 닫으면 외부에서는 가운데 설주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1740년 반구정 중건시에 개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예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유일한 것이다. 정자가 문중 서원으로서 변모하게 되는 데는 이 집안의 문중계가 구성되면서부터인데, 이 문중계가 바로 문회계(文會契)이다. 이때의 기록이 바로 문회계첩(文會契帖, 1780년, 1帖, 필사본, 39×28cm)인데, 이 문회계첩의 기록을 통해 문회계 구성의 목적을 알 수 있다. 계첩은 서문(序文), 좌목(座目), 발문(跋文)으로 되어 있다. 좌목을 보면 이상경 등 64명의 계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좌목의 작성 방식은 매우 간단하여 성명 아래에 자(字)와 생년만 부기하였다. 발문은 이종악(李宗岳)의 지우였던 정박(鄭璞)이 1780년에 지은 것이다. 정박은 이종악의 재종조부였던 이원기(李元紀)의 외손자였다. 계첩의 말미에는 「임청각장(臨淸閣藏)」이란 인장이 날인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종악이 새긴 장서인(藏書印)이다. 결국 이 문회계는 고성이씨 임청각파 인사들이 강학(講學)과 친목을 위한 것이었다.

반구정이 1800년대 이후 문중 자제를 위한 사설 교육장 역할을 하게 되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귀래정의 의도에서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소요적 삶을 노래하며 교유와 풍류를 지향하는 공간이었음을 퇴계 이황과 설월당 김부륜의 다음 시가 잘 말해준다.
일천 점 아름다운 산 큰 들가에 펼쳐 있고
한 가닥 고운 무지개처럼 강물이 성을 안고 흐른다.
너른 들은 푸르러 하늘은 더욱 멀고,
먼 포구에 부슬비 내려 나무는 더 조밀하네.
바라보니 어느 때에 묵은 빚을 갚으랴,
옛 번화함은 끝나고 한가한 시름만 띠었네.
그 가운데 풍류를 함께 할 벗 있으나,
만리를 나는 갈매기와 호탕하게 어울리기 어려워라.
- 이황 시
십오 년 전에 이 강 머리에 앉았었는데,
부끄러이 이제 백발로 다시 물가에 섰네.
먼 숲으로 돌아가는 새,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무성한 나뭇잎에서 우는 매미, 비 뒤에 요란스럽네.
바람과 달은 정이 있어 손을 머물러 취하게 하고,
강과 산은 말없이 사람을 근심케 하네.
자유로이 오고 가는 몸, 제비 같아서,
물결 속에 일렁이는 갈매기도 부럽지 않네.
- 김부륜 시
퇴계의 절구 두 수 중에서 앞의 절구는 반구정의 경관을 그림처럼 잘 묘사하고 있다. 지금도 높은 산에 오르지 않고 평지에서 안동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반구정이다. 이곳의 확 터진 시야가 왼쪽의 학가산에서부터 오른쪽의 선어대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광경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정자의 중심 주제는 자연경관이 아니라 낙동강 위를 노니는 ‘갈매기와 짝하는 것’이므로 위 두 시에서 마지막 구절에 그 점을 잘 살리고 있다. 퇴계는 일만 리는 날아가는 갈매기와 호탕하게 놀 수 없는 자기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지만, 김부륜은 일렁거리는 물결에 투영된 갈매기를 보고 잠시나마 그 환영 속에서 자유로움을 맛보고 짝할 수 있음을 말한다. ‘갈매기와 짝함’이라는 변함없는 주제를 놓고 이 정자에 오는 사람마다 자연에 어떻게 침잠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때로는 퇴계처럼 자연을 보고 늘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는가 하면, 때로는 설월당처럼 잠시나마 자연의 환영에 취해 자연과의 동화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음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반구정은 비움으로써 오롯이 채워지는 조선 선비의 맑은 숨결을 오늘날에도 온화하게 전해주는 공간이다.
고성이씨 신도비 /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