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3

때로는 역사와 문화가 깃든 길 위에서 고뇌와 아픔으로 점철된 길을 만나기도 한다. 특히 선비순례길 제3코스 청포도 길(이육사 선생의 고향 원촌마을 지나는 곳)이 바로 그런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전형적인 시골 들판에 흠뻑 취해 달리다 키 큰 ‘264청포도와인‘ 간판이 도로변을 지키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된다. 이즈음 청포도의 길을 말해주듯 길 따라 포도밭도 심심찮게 보인다. ’청포도‘ 시를 쓰신 이육사 선생의 고향이 가까워지고 있음이다.

 

264청포도와인 판매점 간판

 

길가 작은 주차장에 차를 잠깐 세우고 건지산 자락의 퇴계 선생 묘를 찾았다. 가파른 산비탈을 조금 오르자, 퇴계 선생 맏며느리인 봉화 금씨 무덤이 나타난다. 생전 며느리에 대한 자애로운 마음을 보여주셨던 퇴계 선생과 며느리인 봉화 금씨 역시 시아버님에 대한 끝없는 존경과 섬김을 죽어서도 다하고자 했던 마음을 헤아리게 한다.
 

봉화 금씨 무덤 위의 퇴계 선생 묘가 소박하다. 유학자로서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자그마하고 키 낮은 봉분과 석물들이 소소하다. 관직이나 선생이란 존칭이 없다. 사실 퇴계 선생은 조선 중기 최고의 성리학자로서 그 위상은 대단했다. 하지만 선생은 너무도 겸손하고 소박해서 1570년 눈을 감으면서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셨다. 하지만 사후 7년(1577년)에 후손들이 키 작은 묘비를 봉분 우측에 세웠다. 미사여구 하나 없이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로만 쓰여있다. 단출하고 검소한 선비의 진중한 삶의 내면이 깃들어 있다.
 

수졸당으로 향하던 중, 하계마을 입구 소공원의 독립운동 기적비에 마음이 빼앗겨 한참 머물렀다. 경(敬)과 의(義)가 새겨진 기념비 사면이 한 마을의 이야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450년 전 퇴계 선생의 손자 셋째 동암 이영도 후손이 집성촌을 이룬 전통 마을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이다.
 

전형적인 시골 하계마을에 독립운동가 25명이 나왔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을미의병을 비롯하여 3대가 독립운동을 하신 향산 이만도(1910년 단식으로 순국), 3.1운동 이동봉, 김락, 동은 이중언, 유림단 의거 김락, 이중업, 군자금 모금 이동흠, 이종흠 형제, 만주 항일 이원일 등이 하계마을의 소중한 인재들로 항일 독립투쟁을 위해 몸을 바쳤다. 독립을 위해 희생된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주도층이나 지식인들이 본받아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닌가 싶다.
 

낙동강 수몰로 현재는 십여 채가 될까? 그 옛날에는 이곳 하계마을이 약 백오십여 호 정도 됨직했으리라.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하계마을을 비롯하여 오천군자리, 분천마을 등 여러 마을의 역사가 물에 잠겨버렸다. 이렇듯 예안 일대의 크고 작은 마을들이 수몰되면서 그들만의 옛 문화와 전통을 고스란히 잃어버렸으리라. 모든 것은 다 좋을 수도 다 나쁠 수만도 없다.
 

하계마을이 수몰 지역이란 아픔의 역사를 끌어안았지만, 낙동강 건설은 이런저런 장단점을 안고 불가피하게 이루어졌다. 세월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즉 변화는 필연이기에 남은 자에게는 언제까지나 아쉬움과 추억으로 남아 그리움을 불러 내리라.
 

수몰된 하계마을의 동암종택은 현재 건지산 끝자락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동암종택은 17세기 건물로 싸리나무로 대들보가 만들어져 있으며 18세기에는 재사(별채)를 숙소로 운영했다. 하지만 수졸당은 몇 년 전부터 만수무강을 기원하듯 안동 건진국수로 손님들을 대접하고 264 청포도 체험장으로도 유명했다. 때에 따라 손국수 만드는 방법도 재현하며 고소하고 담백한 맛을 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뜸해졌다. 하계마을 독립운동기적비 동암종택의 수졸당 당재고개에서 내려다본 원촌리
 

하계마을 독립운동기적비
동암종택의 수졸당
당재고개에서 내려다본 원촌리

 

한편 동암종택은 항상 겸손하고 고개를 숙여 나서지 말라는 것을 내세운다. 대개 사람들은 남들보다 좀 안다고 생각하면 거만하게 나서기를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을 가진다는 것도 어렵고 아는 체하지 않고 자숙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토계리와 원천리의 경계인 고갯마루 당재고개의 윷판대에 오른다. 윷판대는 이육사 선생의 ’광야‘ 시상지로 알려져 있다. 물론 만주벌판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나무 데크 계단을 한참 오르니 커다란 소나무가 데크길 중간에서 마치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다. ’이 길을 쭉 따라가면 금방 윷판대를 만날 수 있어.’ 하고 소나무가 일러주는 듯하다.
 

그렇게 조금 올랐을 때 나무 데크길이 끝나고 숲속 황톳길이 펼쳐졌다. 더러는 두 갈래 세 갈래의 오솔길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서성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심심찮게 육사 선생의 명시들이 윷판대로 가는 오솔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6편의 주옥같은 시를 감상하는가 하면 주변 경관을 조망하며 걸음을 옮겼다. 가끔 멀리 보이는 낙동강에 걸쳐진 원천교가 눈앞의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살미의 전경을 보여준다.
 

어느새 높은 고도에 올랐다 싶을 때 나무들 사이로 언뜻 보이는 내살미의 멋진 절경 앞에 한동안 넋을 잃는다. 마치 하회마을과 예천의 회룡포를 연상하게 한다. 태극모양이자 물돌이형인 낙동강이 원촌리 즉 내살미를 평온하게 감싸고 있다. 건지산과 왕모산에 둘러싸여 둥글게 휘돌아나가는 낙동강은 무엇이든 수용하고 배려해 줄듯 넉넉함과 여유를 가졌다. 연화부수형으로 다가온 원촌리의 아름다운 전경에 푹 빠지다 이내 이육사 선생의 ‘광야’ 시판 앞에 선다. 이곳에서 이육사 선생은 호연지기를 기르며 자주독립 의지를 불태우기도 했으리라.
 

이어 수정암으로 이루어진 쌍봉의 암각화에서 서성인다. 윷판형 암각화는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고유의 양식으로 별자리의 표시, 공동체의 무사 평안을 기원하는 의식장소, 단체의 윷놀이 연회장소로 쓰였음을 추정하게 한다. 해서 너럭바위에서 암각화를 찾으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세월 따라 희미해져 가는 암각화의 모습을 쉽게 찾으라는 듯 작은 솔방울을 윷판 모양의 암각화 위에 올려놓았다. 자칫 솔가리와 상수리 낙엽 아래 묻혀 찾지 못했을 윷판 모양을 덕분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가끔은 누군가의 고운 마음이 이렇게 행인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광야’ 시 표지석
윷판대 암각화 위의 솔방울
확장된 이육사문학관

 

이육사문학관에서 먼저 너른 돌 반석에 앉으신 선생의 동상과 마주한다. 반듯한 모습으로 안경을 쓴 이육사 선생이 책을 들고 뒤편의 ‘절정’ 시비 앞에 앉아 고향 원촌리를 넌지시 건너다보고 있다. 고향 원촌리는 이육사 선생 삶의 모태이자 문학인으로 우뚝 서게 하는 자양분이었으리라. 또한, 독립운동가로 절대 물러날 수 없는 강인한 의지로 일제에 저항한 굳은 정신으로 꺾일 수 없는 희망을 주었던 곳이리라.
 

이육사문학관은 2004년 7월 말에 개관, 2017년 전시관, 생활관, 이육사 선생 생가 등을 좀 더 폭넓게 증축하여 재개관했다. 퇴계 이황 선생의 14손인 이육사 선생은 여섯 형제 중 둘째로 본명은 이원록이다. 이원삼이라는 이명도 가졌던 선생은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의 수감번호 264번을 이름으로 쓰는가 하면 이활을 필명으로도 썼는데 모두 나름의 의미를 느끼게 한다.
 

이육사 선생의 삶을 보면 크지 않은 체구에 어떻게 그런 강단 있는 힘과 강인한 의지로 험난한 길을 걸었는지 그저 놀랍다. 선생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꿈을 저버리지 않은 큰 인물이시다. 한두 번도 아닌 열일곱 번의 옥살이와 온갖 고문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주옥같은 저항시를 상징적으로 써내며 꺾이지 않는 희망을 위해 치열한 삶을 불태웠다.
 

다수의 저항시를 비롯하여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계절의 오행’ 등의 수필은 언제나 우리 가슴에 남는 명작으로 이육사 선생 삶의 전모를 헤아리게 한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이 주어졌어도 선생은 자주독립에 대한 꿈을 한순간도 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굳은 의지와 절개를 한층 단련시켜 독립을 위해 자신의 기백을 키워나가는 것만이 자신의 길이기에 오직 그 길을 갈 뿐이라고 선생은 ‘계절의 오행’ 수필에서 말하고 있다. 자고로 위기와 역경에 처했을 때 진실한 마음을 가진 애국자는 그 모습을 드러내며 불의와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는 법이다.
 

다방면으로 재능이 많았던 이육사 선생의 문학(서화, 서예, 시, 수필, 평론)과 독립 정신은 후대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도 남는다. 광복 일 년을 앞둔 1944년 이육사 선생은 중국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하신 후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1960년 건지산으로 이장된 후 다시 2023년 4월 15일, 원촌리, 즉 생가터 옆으로 이장되었다. 드디어 긴 세월을 접고 비로소 고향 땅에 안주한 선생은 드디어 영원한 안식에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육사 선생의 혼이 깃든 문학관을 나서며 고즈넉한 원촌리의 들판에 빠져들다 청포도시비공원에 들렀다. 낙동강 건설로 인해 한때 수몰되었던 이곳 역시 현재는 안동시 태화동 포도골로 이육사 선생 생가터가 이건되었다. 공원 한쪽에 자리한 ‘초가’ 시를 비롯하여 선생의 육우당유허지비(六友堂遺墟址碑)가 지난날 여섯 형제의 우애를 잊지 않는다. 또한 크고 작은 일곱 개의 포도 알맹이 화강암은 ‘청포도’ 시 표지석과 함께 이곳이 청포도의 고장임을 말하는 듯하다.
 

바로 옆에는 조선 후기 목재 이만유 선생의 고택이 있다. 역시 낙동강 건설 수몰로 인해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없는 목재고택에는 현재 이육사 선생의 한 점 혈육인 이옥비 여사님이 머물고 계신다. 여든 살을 훌쩍 넘기신 여사님은 이육사문학관을 오가시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방문자들에게 들려주며 보람 있는 삶을 보내신다.
 

육우당유허지비
청포도시비공원의 ‘초가’ 시 표지석
봉경 이원영 목사 생가

목재고택 옆에는 사은구장 이원영 목사의 생가가 있다. 이육사 선생과 마찬가지로 퇴계 선생의 14대 후손인 이원영 목사님도 일제강점기 때 혁신 유림으로 애국지사였다. 1919년 예안면에서 삼일절 만세 시위를 비롯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투쟁에 맞섰다. 이렇게 도산면 일대로 흩어져 살았던 퇴계 선생의 후손들은 독립을 위해 갖은 고초를 겪으며 다방면으로 애국 활동을 했다. 마당에 홀로 서 있는 ‘봉경 이원영 목사 생가’ 표지석에 어느덧 오후의 햇살이 지어놓은 그늘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공연히 바빠진 걸음은 붉은 모래가 있다 해서 단천리라 부르는 단사마을로 향한다. 단사길에서 잠시 우뚝 서 마을 앞 오른쪽으로 펼쳐진 단사협의 깎아지른 절벽과 마주한다. 뾰족한 멋스러움을 간직한 칼선대가 수려한 위용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뛰어난 자연의 오묘한 손길은 언제나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칼선대 아래로 천만년을 흘러갈 낙동강 너머의 비옥한 넓은 토지는 단천리의 터전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전옥답인 이곳은 풍요로움이 넘쳐 보인다. 농지 한쪽에 자그마한 성황당이 갈선정과 이웃하고 있다. 부정을 막기 위해 쳐진 성황당 입구가 공연히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성황당 안쪽 양 사방으로 액막이 종이 더미가 걸려 있고, 두 개의 돌도 모셔져 있다. 돌 위에 개봉하지 않은 박카스와 약간의 동전들이 주변에 놓여 있다. 두 개의 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신령스러운 기운이라도 있는지 주민들은 마을의 평안과 복을 기원한 듯 지극정성을 보이는 것 같다.

잘 정리된 단사리 들판 한쪽 성황당 앞 왕모산의 수려한 칼선대

걸음은 다시 단사길로 접어들어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마을회관과 노송의 향나무가 드리워진 갈선정과 단사정에 힐끗 눈도장을 찍는다. 마을에 들어섰지만 아직은 차가움이 남아있는 날이라 주민들의 행보가 뜸하다. 아마도 마을회관에 오순도순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으리라.
 

왕모산에 드리운 그림자를 올려다보며 단천교로 향하는 마음을 다음으로 기약하며 발길을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