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4

선비 순례길 제4코스는 선인이 머물렀던 그림 같은 경관을 가진 사색의 길(퇴계녀던길)이자 아픔과 한이 서려 있는(산성과 밀성대) 길이다.
 

낙동강 상류를 가로지르는 호젓한 단천교 앞이다. 왼쪽 아스팔트 길옆 산자락에 ‘녀던길’ 표지석이 한적한 마음을 끌어당긴다. 퇴계 선생이 읊은 도산십이곡 중 아홉 번째 길을 노래했던 녀던길(예던길)로 들어서며 읊는다.

 

 

비록 뵐 수는 없어도 퇴계 선생도 마찬가지 옛 성현이 거닐었던 길을 걸었듯이 나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예던길은 특별히 뛰어난 풍광을 가졌기에 사색의 길이자 철학자의 길로 불린다. 그 옛날 퇴계 선생이 어렸을 당시(13세) 청량정사(청량사)에 있는 숙부 이우 선생에게 글을 배우기 위해 형 이해 선생과 함께 고향인 온계 종택에서 청량정사까지 약 50리를 걸어 다니며 배움의 열정을 꽃피운 길이다. 그 과정에서 선생은 늘 성현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진리의 길을 찾고자 사색에 빠졌으리라.

 

산허리를 조금 올랐을 즈음 육각형의 백운정이 잔잔한 물줄기를 길게 풀어 놓은 낙동강 너머 백운리를 한눈에 보여준다. 푸른 하늘 아래 굽이굽이 이어진 산자락과 들판을 거느리며 쉼 없이 이어지고 있는 말간 물결이 끝없는 인생길처럼 다가온다. 산기슭 절벽 아래에 펼쳐진 아늑한 백운동의 산수는 속세를 벗어난 경관을 간직했음인가? 눈앞의 전경을 노래한 칠언절구의 ‘백운동’ 시가 맑은 시상에 젖게 하는 듯하다.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 새벽 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 내 먼저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퇴계 선생이 이웃 친구 이문량 선생에게 쓴 시다. 아마도 시구에서 ‘그림 속’은 바로 이곳 녀던길 조망대에서 내려다본 비경을 말한 것이리라. 전망대 앞으로 펼쳐진 삼면의 수려한 산들 중앙으로 푸른 강물이 비단 천을 풀어 놓은 듯 절경이다. 백운동 앞으로 흘러가는 낙동강은 원거리의 청량산 앞을 지나 고산협에 위치한 학소대 맞은편 작은 맹개마을을 지난다. 산을 끼고 돌아나가는 물길은 세월의 강으로, 끝없는 방랑자의 길이 아닐까 싶다.

 

도산 9곡 중 청량곡인 녀던길 전망대는 그 어떤 길보다 경이로움을 간직한 시심의 길이기도 하다. 멀리 청량산 왼쪽부터 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등의 봉우리들이 정겹게 서로 어깨를 걸치고 있다. 해맑은 푸른 하늘 아래 선학봉과 자란봉을 이어주는 출렁다리가 원거리에서도 설핏 보인다. 마음은 어느새 한달음에 장인봉에서 선학봉, 자란봉, 향로봉 등 12봉우리를 넘나들 것 같다.

 

사색의 길이자 철학자의 길인 녀던길
청량산 조망대에서 바라본 단사협의 경관

 

멋진 주변 장관 못지않게 퇴계 선생이 자연 앞에서 지난날의 감흥을 읊은 세 점의 표지석이 인생무상을 그린다. 그도 그럴 것이 농암종택 쪽의 강 언덕은 삽재로 수직 절벽의 학소대가 우뚝 솟아 있다. 날쌘 절벽의 우람함은 웅장함 그 자체다. 한때 천연기념물인 오학(먹황새) 서식지였으나 현재는 학의 자취는 보이지 않고 오학 번식지였음을 알리는 푯말만 남았다. 수려한 학소대가 낙동강과 함께 이 강산을 수놓으며 무심한 세월을 헤아리게 한다.
 

청량곡 아래의 뛰어난 자연을 읊은 한속담을 신선인 듯한 경치로 표현했던 퇴계 선생은 노년이 되어 어렸을 때 낚시하던 곳에 대한 회한을 미천장담의 시로 읊었다. 또한, 강가의 커다란 네 개의 암석은 경암이라고 천년을 두고도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우람하고 굳건한 바위라 노래했다.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는 ‘풍혈’(바람구멍)에 이끌리다 강가 넓은 암반 위의 크고 작은 다량의 구멍과 마주한다. 크기와 모양이 일정치 않으며 어떤 일관성이나 연관성 없이 자유자재로 암반 위에 찍힌 구멍들이다. 백악기의 작은 공룡이나 시조새의 발자국이라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신생대의 어떤 동물 발자국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단정적으로 무슨 발자국의 흔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많은 의문이 든다. 이에 가송리 깊숙한 강변 수변 길은 태곳적의 흔적이 머물러 있을 법한 신비스러운 곳이다.
 

녀던길 전망대에서 건지산을 오른다. 안내판을 따라 산등성이를 오르니 퇴색된 상수리 나뭇잎이 오솔길을 두껍게 덮고 있어 길 찾아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선비 순례길이란 이름을 새긴 리본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초면인 걸음을 이끌어주었다. 산길을 걷다 보면 때때로 기형적인 나무를 만난다. 곰팡이나 세균에 의해 생긴 나무의 혹이다. 소나무는 혹을 내치기보다 신체 일부로 받아들여 성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는 일정 부분 수용과 치유의 힘을 가진 나무의 진득한 내면을 보게 하는 것 같다.
 

한참 올랐다 싶을 때 소방도로를 만나고 산 능선에 뾰족한 가시를 드러낸 음나무와 두릅나무, 은행나무를 집중적으로 재배하고 있는 넓은 농지도 만난다. 깊은 산속에 놓인 농지가 힘겨운 삶처럼 느껴진다. 걸음은 다시 산의 능선을 넘어 바닥에 정사각형의 시멘트로 만들어진 십자 표시와 나무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통신탑과 마주했다. 아마도 이곳이 건지산 정상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폰의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위치는 통신탑에 머물며 더는 건지산(557m) 정상을 알려주지 않았다.
 

건지산 오솔길의 안내 띠
기형적인 소나무의 자태
벽력암 전망대에서 바라본 농암종택

 

건지산을 내려오며 다음 코스인 농암종택을 마음에 두었다. 먼저 농암종택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를 찾았다. 어렵지 않게 벽력암 위 전망대에서 농암종택의 완경(玩景)을 즐겼다. 오후의 해맑은 햇살을 잔뜩 끌어안은 평온한 고가의 모습이 고즈넉했다. 울창한 수림을 자랑하는 산들은 널찍한 들판을 부려 놓고 아기자기하게 모인 예스러운 고가들을 둘러싸고 있다. 기품이 넘치는 고택은 크게 농암종택과 분강서원, 강각, 애일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건물들이 그 옛날의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법도 하다.
 

벽력암 앞의 한속담을 굽어보며 예던길 전망대에서 보았던 ‘寒粟潭’ 표지석을 잠깐 떠올려본다. 한속담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옛날에는 우거진 솔숲과 높은 절벽, 깊은 강의 수심이 자아내는 장관은 더욱 일품이었으리라. 수려한 자연을 벗하여 종택 앞 은빛 모래사장을 거닐면 부대끼는 속세의 삶을 벗어난 무아지경에 취해본다.
 

노년이 되어 강호에 은거했던 농암 이현보 선생의 연시조 10수인 ‘어부단가’는 어부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참판과 숭정대부의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인 분천리로 돌아온 농암 선생은 자연을 노래하며 부모님께 효를 다했다. 참고로 자연을 노래한 농암가는 지난날 도산서원 가는 길 오른쪽 초입에서 표지석으로 만났다. 지난 선인이 노래했던 산천은 언제나 그대로이기를 고집하지만, 변해가는 세월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650여 년이란 세월은 1975년 안동댐 건설로 도산면 분천리에 자리했던 농암종택을 가송리로 이건 하게 했다. ‘강호문학의 창도자’ 농암 이현보 선생의 고조부 이헌 선생이 지었다는 긍구당(肯構當)이 농암종택의 솟을대문 정면에서 곧장 보인다. 종택의 중심 건물로 멋스러운 팔작지붕 천정의 현판이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갈 것이란 심오한 뜻을 품고 오가는 사람들과 마주한다.
 

농암 선생의 어머니 안동 권씨가 지었다는 ‘선반가(宣飯歌)’ 즉 음식을 베풀며 노래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 사랑채의 적선(積善) 현판이 집안의 내력을 말해준다. 이에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입신양명의 길을 걸었던 농암 선생은 부모님을 위해 하루하루 날을 아낀다는 효심으로 애일당을 지었다. 즉 구순의 부친과 숙부, 외숙부를 모시기 위함이었다. 농암 선생이 부모님을 비롯하여 집안 어른을 공경하고 모시는데 예를 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고로 지극한 효는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아갈 때 그 수명도 길어지리라. 이같이 인간미를 잃지 않고 성리학적인 삶을 지향했던 농암 선생 가족은 장수한 집안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농암종택 한쪽에 누룩이 널려 있다. 자연 발효한 순곡(청주)을 종부님이 직접 만드시는 모습이다. 일엽편주(一葉片舟) 즉 한때 이현보, 퇴계 이황, 금계 황준량 선생이 작은 배를 타고 술잔을 나누며 풍류를 즐긴 것에서 비롯된 농암종택의 전통주이다. 간혹 이곳을 찾거나 고택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종택의 가양주를 음미하며 일엽편주의 흥을 느껴봄 직하다.
 

고산정 이야기는 5코스나 9코스에서도 할 기회가 있기에 곧장 축융봉 이야기로 들어간다. 청량산 12봉 중 하나인 축융봉을 오르기 위해 35번 국도를 따라 청량산에 닿아 먼저 선학정(仙鶴亭)에서 퇴계 선생의 청량산가(淸涼山歌) 시비와 마주한다.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라는 시문에서 보이듯이 퇴계 선생은 수려한 청량산에 대한 시와 글을 다수 남겼다. 이렇듯 수백 년이 지나도 청량산의 수려함은 언제나 아름답기에 사시사철 뭇사람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축융봉을 가기 위해 청량산 도립공원 등산 안내도가 알려주는 4코스를 따라 산성 입구에 닿았다. 세 마리의 솟대가 큰 키를 늘리며 서 있는 산성 입구 오른쪽에 퇴계 사색길(3.3km) 안내판이 눈길을 끌지만, 훗날을 기약한다. 밀성대를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협곡의 그것처럼 다가온 양쪽 산의 커다란 바위가 길목을 지킨다. 그 길목 너머로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산으로 들어와 쌓았다는 산성이 산등성이를 타고 쭉 이어졌다. 적을 방어하기 위해 험난한 산등성이를 따라 오밀조밀하게 쌓인 견고한 산성이 백성의 노고를 헤아리게 한다.
 

돌계단 같은 산성이 한동안 오르막만 보여준다. 할딱이는 숨을 고르며 절벽 위에 앉은 육각형의 밀성대를 올려다본다. 바로 머리 위에 놓인 것 같았지만, 밀성대까지는 얼마간 더 올라야 했다. 마치 하늘에 오르는 듯 산성은 오를수록 한층 가팔라지고 몇 개의 커다란 절벽이 발길 따라 옆으로 우뚝 다가오기도 했다. 만물이 깨어나는 이즈음 산성의 돌을 뚫고 만개한 샛노란 산괴불주머니꽃이 강인한 생명력을 머금고 힘겨운 걸음을 밝혀준다.
 

퇴계 선생 ‘청량산가’ 표지석
산성을 오르며 쳐다본 절벽 위 밀성대
산성길을 밝히는 산괴불주머니꽃

밀성대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으로 들어와 군사훈련으로 반격을 도모했을 때 군졸과 백성들이 명령을 듣지 않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처형했던 곳이다. 까마득한 절벽 위의 밀성대(密成臺)가 군주의 명령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밀성대를 지나 계속 이어지는 산성길을 한참 올랐다 싶은 어느 순간 높은 고도를 말해주는 듯 정면으로 청량산 육육봉이 펼쳐졌다. 높이 올라갈수록 원거리의 풍경은 한층 멋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선학봉과 자란봉을 이은 국내 최장 높이의 하늘다리가 허공을 가른다. 또한, 산허리의 청량사와 절벽 위에 앉은 응진전은 신선의 집처럼 와닿았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높이를 더할수록 한층 가파르게 다가오다 마침내 두 개의 절벽 사이로 놓인 철재 계단을 올라 해발 860.9m 축융봉에 닿게 했다.
 

능선 따라 이어진 산성길
멀리 청량사와 절벽에 앉은 응진전

축융봉 정상의 경치는 너무도 수려하여 마음의 온갖 찌꺼기가 씻겨 나가서 상쾌한 기운이 전신에 스며들게 했다. 정면으로 펼쳐진 청량산 11봉우리가 한 줄로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은 정겹다. 단번에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넘나들 것처럼 가뿐하다. 왼쪽 끝 봉우리는 장인봉, 오른쪽 끝 봉우리는 탁립봉 그리고 왼쪽 낙동강 상류 높은 산자락 등성이에 앉은 밭과 집들의 터전은 만리산이라 가늠해본다. 해맑은 햇살을 가득 받아내며 원거리에 취한 가벼운 마음은 시간을 망각한 채 온 산을 누비느라 고단함을 잊게 했다.
 

축융봉에서 바라본 청량산 육육봉
거대 암석 앞에 자리한 공민왕의 광감전과 산신각

하산하는 길에 공민왕 사당을 찾았다. 거석을 등진 정면 1칸, 측면 1칸의 광감전(曠感殿)이 옆의 산신각과 함께 지난 고통의 세월을 잊지 않는다. 홍건적 난을 피해 이곳 축융봉 일대에 산성을 쌓고 대치했으나 결국, 신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공민왕이 시대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사위의 빼어난 축융봉 자태가 무심한 기분을 한껏 들어 올려 줄 법도 하다. 하지만 비운의 왕이 남긴 한과 서러움이 예나 지금이나 산속에 깃들어 있음인지 공연히 가라앉은 마음이 걸음을 무겁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