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7

길은 어떤 갈래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느냐에 따라 여러 심상을 가져다준다. 그런 의미에서 안동 선비 순례길 제7코스는 종합안내소에서 도산온천까지 이어지는 산림 문학의 길(7.8KM)로 사색을 위한 힐링의 공간이자, 선인의 문화유적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예끼 마을에 있는 선비 순례길 종합안내소는 도산권역 일대의 문화유적에 대한 관광 홍보를 위해 2018. 4. 26 도산면 서부리 174-105에 개소되었다. 종합안내소는 관광 수요와 증대를 위해 문화관광해설사를 배치했다. 당시 선비 순례길 전 코스 탐방 및 도산면 일대 관광을 위해 많은 사람이 안동 서부리 예안 일대를 찾았다. 하지만 2019년 12월 말, 코로나19의 발발로 인해 갑자기 사람들의 발길은 뜸해져 갔다. 3년 가까이 코로나19 감염 위험이 길어지면서 선비 순례길 종합안내소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문을 닫게 되었다. 머잖아 폐쇄된 현재의 종합안내소가 다른 유익한 공간으로 그 쓰임새를 다 하게 되리라 본다.

 

예안향교 가는 길에 평산신씨 송곡파의 큰집인 송곡 고택 앞을 지난다. 담장 너머의 고택이 전원적이다. 주인의 부지런한 손길이 머물렀는지 고택 옆 텃밭이 비옥하다. 아담한 팔작지붕에 □자형 고택이 전형적인 반가의 모습이다. 원래 예안면 서부동에 있었던 송곡 고택은 안동댐 건설로 이곳 예끼 마을(서부1리)로 옮겨져 가문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가문을 대표하는 고택은 필요에 따라 자리를 옮겨서 지속적인 보존의 가치를 보여준다.

 

문헌의 고장답게 예끼 마을 옆에는 조선 시대 지방 공교육기관이었던 예안향교가 있다. 유교 교육과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창건된 향교로 600여 년의 역사를 가진다. 모두 맞배지붕의 건물들이 전당후묘(前堂後廟)로 앞은 강학의 공간, 뒤는 분묘의 공간인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루가 시원스러운 양호루(養浩樓) 뒤 명륜당(明倫堂) 앞 뜨락에 민족의 표상인 무궁화 두 그루가 있다. 100년 동안 민족의 혼을 간직한 안동 무궁화(목근)다. 일제강점기는 우리의 유구한 문화와 역사, 전통을 무참히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꽃인 무궁화도 없애려 했다. 이에 지역의 독립투사가 민족을 상징하는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일본인의 눈을 피해 몰래 예안향교 뜨락에 심었다. 저항의 표상으로 다가온 안동 무궁화는 인고의 날을 지새우며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왔다. 하지만 백 년이란 긴 세월을 이겨내지 못한 안동 무궁화는 고사하면서 옆으로 맹아를 키워냈다. 현재 두 그루의 맹아가 일제에 항거했던 우리 민족의 강인한 근성과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며 성장의 꿈을 펼치고 있다. 무더위에 오백 원 동전만 한 새하얀 꽃을 피워내는 안동 무궁화는 언제봐도 단아한 아름다움과 기품을 지녔다.

 

안동호와 선성 산성공원과 마주한 예안향교
명륜당 뜨락의 안동 무궁화

 

예끼 마을 위 한국국학진흥원 옆에 폐교된 예안분교장의 플라타너스 고목이 긴 세월을 헤아리게 한다. 1909년 4월 9일에 개교할 당시 예안 초등학교는 선성 수상길 부교 근처에 자리했지만, 수몰되었다. 1976년 낙동강 댐 건설로 인해 예안 초등학교는 부득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후 예끼 마을 학생 수는 변화의 바람에 따라 차츰 줄어들어 예안분교장이 되었다. 그러다 날이 갈수록 학생 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마침내 2009년 3월 1일에 폐교되었다.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주관하는 ‘이야기 할머니 사업단’ 건물로 쓰이고 있다. 자칫 방치될 법한 황량한 폐교가 유익하고 의미 있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앞에는 낙동강을 두고 뒤로는 영지산을 걸치고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아름다운 경관을 지녔다. 지난 선조들의 삶과 문화유적 등 역사를 유지보존 발전시켜 나가는 것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 이황 선생 고향 근처 예안에 1995년 한국 국학진흥원이 설립되었다. 안동을 비롯한 도산면 일대는 추로지향(鄒魯之鄕) 고장으로 그 중심에 한국국학진흥원이 자리하고 있어 우리 지역의 큰 자산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통문화원형 발굴을 비롯하여 지역의 정체성을 벗는 것과 동시에 국학연구를 위한 목적으로 자리한다. 나아가 민간의 전통문화 기록 유산을 수집 조사 연구하여 창조적 계승을 이루어나간다. 민가의 귀중한 각종 자료는 우리 지역의 소중한 정신 문화유산이다. 이는 수백 년을 이어갈 우리 지역의 매우 뜻깊은 일로 과거를 연구하여 현재를 재조명하고 미래의 발판을 쌓아가는 것에 일임할 것이다.

 

계단을 올라 원대한 꿈과 품격을 느끼게 하는 우아한 건물 입구로 들어선다. 말끔하게 다듬어진 뜨락에 자리한 청동 천구의(혼상)가 우주 만물을 보여주고 설명해 줄 법하다. 방대한 이 삶의 끝없는 의문에 대한 질문과 답변은 우리가 영원한 해독해야 할 숙제가 아닐까 싶다.

 

세계기록유산 전시체험관에 전시된 문중과 서원에서 기탁된 수백 점의 편액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활달하고 단아한 글씨들이 멋스럽다. 즉 예서, 전서, 행서, 초서, 해서체로 이루어진 서체들이 편액의 압축된 의미와 뜻을 내포한 묘미를 가졌다. 2016년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지역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편액은 우리의 자랑이자 기쁨이다.

 

장판각 안의 목판 도서관

 

보통 사전 예약하지 않은 채 장판각 안을 수시로 구경할 수는 없다. 목판인 유교책판이 적정 온도와 습도에 따라 보존 관리되기 때문이다. 이날은 마침 사전 예약이 된 한 단체를 따라 장판각 안에 들게 되었다.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수백 개의 문중과 서원에서 기탁된 책판 64,226장이 보관된 장판각은 한마디로 목판 도서관이다. 목판에 판각한 수만 장의 책판 역시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목판 인쇄술의 진면모와 선조들의 노고가 녹아 있음을 느낀다.

 

수장고의 자료들은 후대인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에 소중한 우리의 자산인 국학 자료들이 전문 연구원들에 의해 날마다 한문 해독의 과정을 거친다. 나아가 문집 분류 및 체계적인 정리, 고문서 DB 구축 등 다양한 활용도를 위한 콘텐츠 개발도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국보, 보물, 국가 등록문화재, 중요민속자료, 경북유형문화재, 경북 문화재자료 등 수많은 국학 자료가 디지털화를 이루어나간다. 방대한 각종 국학 자료가 훗날 모두 해독되고 디지털화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읽히는 날이 머잖아 다가오리라.

 

한편, 크고 작은 행사와 프로그램이 심심찮게 행해지는 인문 정신연수원 옆에는 호계서원(虎溪書院)도 있다. 1573년 이황 선생의 덕행과 추모를 위해 창건한 호계서원은 당시에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불렸다.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월곡면 도곡리에 있던 호계서원이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근처로 옮겨오게 되었다. 안동 유림의 본거지자 안동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호계서원은 영남 유림의 학맥과 결속을 주도적으로 이끄는데 일임했다.

 

정기 기획전 상소(上疏)가 전시된 유교문화박물관
호계서원의 양호루

 

하지만 도산서원과 호계서원에서 퇴계 선생 위패 중복 및 400년 동안 병호시비(1620년 추가 배향된 김성일, 유성룡 선생의 위패 서열)로 인해 논란이 많았다. 현재는 퇴계 선생의 위패가 철폐되고 서애 선생은 좌향, 학봉 선생은 우향, 그 옆에는 대산 이상정 선생을 배향함으로써 병호시비(屛虎是非)는 종료되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호계서원은 이제 모든 잡음을 잠재운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호계서원은 한국국학진흥원의 주도하에 강학과 공론의 장으로서 안동 유림과 선비문화를 원활하게 이끌어 갈 것이다.
 

호계서원 뒤 영지산 자락의 전망대에 오른다. 키 큰 소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맘껏 들이킬 수 있는 완만한 등산길이다. 얼마 걷지 않아 마가복음의 한 구절을 비롯하여 소크라테스, 세종대왕, 공자, 퇴계 이황, 도마복음 등의 명언 판이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 서 있다. 크게 공감되는 유익한 인생 명언들이다.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을수록 잔잔한 감동과 함께 힘과 용기 그리고 지혜가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명승지나 공원 등에도 이처럼 철학적인 인생 명언 판을 많이 세워두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려줄 것 같다.
 

어느덧 팔각정의 전망대에 올라 원거리를 굽어본다. 굴곡진 안동호 둘레를 감싼 몽실몽실한 산들이 서로 어우러져 우리의 아름다운 강산을 보여준다. 멀리 선성 수상길의 부교와 선성 공원,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듯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이 강산의 파노라마가 알 수 없는 인생길처럼 와 닿는다.
 

퇴계 이황 선생의 형 온계 이해 선생 종택이 우아하다. 고가 앞 500여 년을 건너온 거대 밤나무가 정민공 이해 선생을 비롯하여 대를 이은 종택 주인들의 지난 행적을 들려줄 법도 하다.
 

넓은 잔디밭 한쪽의 안동 무궁화 식수가 온계 종택 12대 주손 이의화 동생 지암 이인화 의병장의 활약상을 말해주는 것 같다. 암울한 시대에 맞섰다는 것은 언제까지나 칭송받을 일로 후대인에게는 경종을 울려준다.
 

온계 종택에 이웃한 노송정 종택은 온혜파 종택으로 퇴계 선생의 조부 이계양 선생 집이다. 조부 이계양 선조의 맏아들인 이식 선생에 의해 퇴계 선생은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성리학의 대가이다. 이에 솟은 대문에는 聖臨門 이란 현판이 자리하게 되었다. 퇴계 선생의 제자 학봉 김성일 선생이 ‘성인이 든 문’이라 해서 가지게 된 이름이다.
 

성인이 든 문이라는 성임문 너머의 노송정

 

열린 성림문 뒤로 老松亭 기와가 그림 같은 멋스러움을 자아낸다. 대청마루 천장 양쪽의 해동추노(海東鄒魯), 산남낙민(山南洛閩) 현판을 지키는 듯한 박제된 매가 대들보에 서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다.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매의 모습에 위엄이 서려 있다.
 

온천정사(溫泉精舍) 마당 한쪽의 퇴계 선생 귀향길 敬 표지석 및 시비가 앙증맞다. 노송정 선조가 두 아들에게 보낸 권학시와 퇴계 선생이 손자 안도에게 보내는 시다. 퇴계 선생의 조부인 노송정 이계양 선조는 일찍이 자손들이 학문에 정진할 것을 권학시로 남겼으며, 퇴계 선생 역시 용수사에서 공부하는 손자 이안도에게 학문을 갈고닦는 것에 열중할 것을 시로 권했다. 집안 대대로 학문을 연구하고 탐구하라는 열정이 대를 잇고 있는 모습이다.
 

온천정사
아담한 계자난간에 둘러쳐진 퇴계 선생 퇴실

종택 안채의 퇴계선생태실(退溪先生胎室)에 눈길이 머문다. 장차 훌륭한 자식을 잉태하려 꿈꾸는 여인이라면 한 번쯤 퇴계 선생 태실에서 머물고자 할 법하다. 자고로 뛰어난 인물은 태어난 방도 조명을 받는다. 예전에는 큰 인물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가 주목받았지만, 현재는 대부분 병원에서 태어나기에 태실의 의미는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어떤 배경과 조건에서 성장했고 노력하는 삶을 살았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고 매끄럽고 부드럽다는 도산온천(온혜온천)을 찾았다. 원탕 건물이 마치 비닐하우스 같은 모습이라 좀 생소하지만, 물 만큼은 안동 어느 온천보다 질이 뛰어나다. 옛날 한 노파가 자식의 병을 이곳 산 밑의 온수를 이용해 고친 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온천수다. 나트륨 성분이 많아 노화 방지, 피부미용, 각종 관절염, 동맥경화 등 건강에 아주 좋다는 소문에 지역민들이 많이 찾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한여름의 불볕더위를 마다하고 온천탕에 들어갔다. 한참 지나니 이날의 피로가 사라지고 부들부들해진 살결이 산뜻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가뿐해진 몸과 마음이 길 위에 나서자, 주황빛 햇살이 녹음 위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