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가끔 유서 깊은 곳을 찾아가는 것은, 지난 옛 문화와 역사를 알아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지역의 여러 마을을 둘러보면 고택과 함께 뛰어난 선인들이 존재했음을 알게 된다. 대대로 전의이씨와 예안이씨의 세거지(世居地)인 안동 풍산 우렁골 역시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이 선비들이 많았다. 이에 앞서 유교 문화길 제1길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서 한다.

 

마을 중앙 정자 옆에 전의이씨문화유적안내(全義李氏文化遺蹟案內) 표지석 앞이다. 곧장 우렁골 양정공(襄靖公) 이화 선생과 청헌공(淸憲公) 난졸제 이산두 선생의 유적을 찾아들게 한다. 한적한 외길 따라 걸으면 약간 높은 담이 끌어안고 있는 국가 민속 문화재 제178호 지붕이 조금씩 고개를 내민다. 전의이씨 일성당 종택이다. 사가(私家)라 그런지 이날은 인기척이 부산했다.

 

대개 고택의 안채와 사랑채는 떨어져 있는데 일성당의 안채와 사랑채는 이어져 있어 특별하게 보인다. 매일매일 반성한다는 뜻을 가진 일성당은 이문한 선생의 집으로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곳이다. 대개 집의 당호는 주인의 성품을 대변해주기도 하는데 일성당 역시 평소 이문한 선생의 지조 있는 삶의 됨됨이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일성당에서 조금 올라가면 양정공 이화 선생과 청헌공 난졸제 이산두 선생을 기리는 기적비(紀蹟碑)를 만난다. 최근에 세워진 듯한 선조의 기적비가 차츰 잊혀가는 두 분의 진중한 삶을 헤아려보게 하는 듯하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가파른 언덕 위, 수문장처럼 서 있는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침류정을 지키고 있는 듯 내려다보고 있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리로 잘 알려진 양정공 이화 선생의 집이다. 외로움에 갇힌 호젓한 침류정이 어깨높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빼고 있다.

 

 

침류정 아래 옆 기슭에는 이화 선생의 7세손 난졸재 이산두 선생의 어필영정각(御筆影幀閣) 또한 담장 안에 놓여 무심한 세월을 건너고 있다. 현판의 ‘어’자가 다른 글자보다 조금 올려진 채 쓰여 있다. ‘어(御)’는 영조를 말하기에 다른 글자보다 조금 더 위로 올려 쓴 것을 볼 수 있다. 영조는 화공을 시켜 청렴함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90세 이산두 선생의 영정 그림을 그리게 했다. 보존가치가 높은 선생의 영정은 유형문화재 481호로 지정되어 있다.

 

난졸재는 몹시 가난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산두 선생의 청렴함을 말한다. 그 한 예로 ‘녹두 한 꼬투리로 허기를 면하고 양반은 대추 세 개로도 점심을 떼운다.’ 했다. 지극한 가난과 함께했던 이산두 선생의 검소함을 보여주는 얘기다. 이를 말해주듯 청헌공이란 시호가 난졸재 이산두 선생의 청빈함을 말해준다. 풍부한 물질에 노출된 현재의 삶에서 위 일화는 언제까지나 우리의 마음을 자극해줄 법도 하다.

 

우렁골은 가는 곳마다 문화재가 있다. 하리동에는 두 개의 석탑도 있다. 마을의 낡은 집과 밭 사이에 있는 하리동 모전 삼층석탑의 하단부가 허술하다. 외롭게 서 있는 모전 삼층 석탑은 자연석 위에 둥근 기단이 탑신을 받치고 있다. 하나의 커다란 자연석이 주춧돌이나 지대석인 양 석탑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아마도 상대석 혹은 하대석이 사라진 것인가? 어찌 되었든 기단부가 어떤 이유로 사라져 조금은 엉뚱해 보이는 커다란 자연석을 깔고 탑신이 올려져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탑신을 받친 옥개석은 줄어든다.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수수한 모전 석탑이다.

 

밭 한가운데 자리한 하리동 삼층석탑은 신라 시대 양식이 남아 있는 고려 탑으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갖춘 하리동 삼층 석탑은 한때 불교가 번성했을 시 존재했던 탑으로 보인다. 주민들의 삶과 가까이 있는 두 개의 삼층 석탑이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옛날에는 절을 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풍산읍 입구의 체화정은 만포 이민적 공이 학문을 닦은 곳이자, 이민적 공의 아들 용눌재 이한오가 노모를 모신 곳이다. 또한, 만포 이민적 선생이 형인 이민정 선생과 형제애를 나눈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2칸 중층의 팔작지붕 체화정(棣華亭)은 앵두나무 체(棣)로 형제의 우애를 말한다. 정자 앞 인공섬에 세 개의 삼신 선산(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상징한다. 정자 안으로 자연을 끌어당긴 운치가 멋스럽다. 체화정 뒤편 담락재(湛樂齎) 편액은 시경의 화락이담(和樂而湛)의 준말로서 이는 ‘화목함과 즐거움이 끝이 없다.’라는 뜻을 가진다. 현판은 조선 3대 풍속화가 중 한 분인 김홍도 선생 글씨로 아기자기한 체화정의 전경과 잘 어울리는 적재적소의 글귀가 아닐까 싶다.

 

아기자기한 풍경 속에 묻힌 아담한 체화정 / 
이홍인 공의 정충각과 이한오 공의 정효각

 

부산한 걸음은 풍산읍 우체국 옆에 있는 맞배지붕의 자그마한 두 개의 정충각과 정효각을 만나게 한다. 도로변에 자리한 정충각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 풍은 이홍인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함이고, 정효각은 의병장 풍은 공의 8대손 용눌재 이한오 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풍산중앙길을 오고 간 사람들이라면 예안이씨 정충각, 정효각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분은 전편에 이야기한 예안이씨 종택 쌍수당의 주인으로 백행지 근본을 닦은 충효의 인물이었음을 재차 언급해도 부족함이 없다.

 

한편 잡초 같은 삶이었어도 충효를 실천하며 사라져간 일반 백성들도 많았을 줄로 안다. 전란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한마음으로 뭉치게 했다. 그것은 더불어 사는 삶이었기에 비록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어도, 우리 지역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을 주민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단호 1, 2리는 오미마을 즉 오미촌(鰲尾村)으로 불리기도 하나 보다. 낯선 초면인에게 오미촌을 오미동(오미리)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오미동(五美洞)은 오미촌과는 다르다는 것을 내비게이션을 통하여 뒤늦게야 알아차린 후, 헛웃음을 지으며 목적지를 향해 다시 한동안 달렸다.

 

풍산읍 오미리는 오미골, 오릉, 오묘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다섯 봉우리자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오미리를 평안하게 감싸고 있어 오릉, 오묘라 한다. 또한, 다섯 명의 대과 급제자가 나와 오미마을이라고도 불린다. 특히 이 마을은 여덟 명의 형제가 모두 소과에 오르고, 다섯 명은 대과 급제자를 배출시킨 명망 높은 마을이자 독립운동의 성지이기도 하다.

 

오미 1리(五美洞) 어귀에 붉은 봉황문(鳳凰門)이 유연당 김대현 공의 아홉 분 아들을 상징하는 듯 늠름하게 서 있다. 봉황은 한 번에 9개의 알을 낳는 전설적인 새로 한 집에 사마시(司馬試)와 대과에 급제한 인재들을 말한다. 봉황문 바로 뒤에 마을의 역사를 말해줄 법한 400년 느티나무 곁에 청천 김진섭 선생 문학비 표지석도 눈길을 끈다.

 

한때 이곳에서 지냈을 법한 문학평론가이자 수필가인 김진섭 선생의 수필 ‘백설부’ 일부분이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雪에게 묻는 형식의 글로 백설로 덮인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 눈을 예찬한 백설애(白雪愛)가 깊은 사고와 관념을 일깨워 줄 법도 하다.

 

24명의 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오미 광복 운동 기념 공원 / 
학암 김재봉 선생 어록비

 

마을 언덕에 24명의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오미 광복 운동 기념 공원에 들렀다. 풍산 김씨 집성촌인 오미리의 많은 자손이 독립지사였음을 말해준다. 학암 고택의 김재봉, 천황이 사는 궁성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을 비롯하여 사대부인 풍산 김씨 영감댁은 김정섭, 김이섭, 김응섭 형제 등의 희생적인 애국심은 말 그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불의에 맞선 애국지사들의 혼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인 양 ‘오미 광복 운동 기념탑’ 위에서 언제까지나 살아 꿈틀거리게 하는 것 같다. 오직 독립을 위해 매진했던 지사들의 삶과 어록비 앞에 서면 누구든지 가슴 울리는 숙연함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기념탑에는 타임캡슐이 숨겨져 있는데 2508년 4월 16일에 타임캡슐을 열게끔 되어있다. 그날의 타임캡슐 개봉은 후대인들에게 허백당 문중과 풍산 김씨 세보 및 다양한 많은 것들을 재차 보여주고 보완해 줄 법하다.

 

전통방식으로 한지를 생산하는 풍산 안동 한지 공장이 소박하다. 한지는 얇은 듯 강하고 두꺼운 듯 바람이 잘 통하고 보존성도 좋아 우리 민족 정서와 닮았다. 원료인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골고루 섞고, 뜨고, 말리는 등,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백번 만져서 완성하기에 한지를 ‘백지’라 부른다. 머릿속에서 지난 한 과정이 스쳐 지나간다.

 

질적으로 우수한 한지가 그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직접 손으로 일일이 반복적인 작업을 수차례씩 하기에 한지는 질적으로 우수하다. 특히 한지는 부드럽고 질기며 내구성이 뛰어나 공예 및 다방면으로 활용 가치가 높아 우리의 실생활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날이 갈수록 한지의 실용성이 다양해지고 있음이다.

 

신라 시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대방광불화엄경 등 목판 인쇄물을 간직한 한지는 천년의 종이다. 해서 한지는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불빛 아래서 그 옛날 전통방식으로 한지를 생산하는 소수의 생산자 손길이 분주하다. 우리의 한지가 날이 갈수록 고급 제품으로 거듭나고 있는 모습이다. 종이 한 장이 나오기까지 생산자의 수고로움이 눈앞에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