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유교 문화길 제2구간은 풍산 들과 낙동강을 따라 하회마을을 굽어보는 ‘하회마을 길’로 소산마을에서 현화삼거리까지 총 13.7km다. 이 길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서 깊은 전통 마을로 민족문화가 깃들어 있다.

 

먼저 구 안동김씨와 신 안동김씨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안동김씨 집성촌인 소산마을로 향한다. 마을 형상은 ‘소가 누운 형국’이라 하여 금산이라 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낙향한 김상헌 선생은 “김가가 사는 곳을 금산이라 하면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하여 검소하다는 의미로, 소산마을로 변경했다. 바뀐 소산이란 이름 때문인지 왠지 마을이 편안하고 소박하게 와 닿는다.

 

안동의 명망 높은 여러 마을 중 하나인 소산마을 입구 생태공원에 문과 급제자(대과)를 기리는 청룡 솟대 1개와 기러기 솟대 8개가 있다. 또한, 청에 끌려가며 조국을 떠나야 하는 비참함을 노래한 우국충정의 명시조를 남긴 청음 김상헌 선생 시비도 자리하고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김상헌 선생은 병자, 정묘호란 시 척화파 대신으로 유명한 분이다. 특히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인종을 호송한 후 주전론(主戰論)을 펼쳤으나 인조의 굴욕으로 주화론(主和論)을 펼친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를 찢고 통곡했으며 식음을 전폐했다. 평소 김상헌 선생의 강직한 성격과 충심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소산마을은 청음 김상헌 선생 후손들이 세거했던 곳이다. 하지만 조선 말에는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즉, 순조 때 신 안동김씨 김조순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60년간의 세도정치가 명성을 떨쳤다. 세도정치 하면 누구나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폐단의 온상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소박해 보이는 마을이 한때 무소불위의 힘과 권력을 가졌던 곳이라는 것에 왠지 경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을 앞 동오라 불리는 언덕 위에 조선조 사헌부를 지낸 김영수 선생이 88세의 노모를 모시고 즐겁게 해드렸다고 하는 삼구정이 있다. 정자 옆에 제법 큰 돌 세 개가 거북이 모양이라고 한다. 이는 십장생의 하나로 모친이 거북이처럼 오래 살기를 기원하려는 의미에서 놓인 상징적인 돌이다.

 

급변하는 현시대는 갈수록 인간적인 미가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우리는 때때로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효를 망각하기도 한다. 부득이 어떤 이유로 부모님의 장수가 자녀들에게 부담스럽게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러나저러나 갈수록 희미해져 가는 효는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인간의 기본 도리이자 도덕적 의무가 아닐까 싶다.

 

 

마을에 들어서면 김상헌 선생의 청원루를 비롯하여 안동김씨 19세손 김중안 선생의 동야 고택, 김영수 선생의 집인 안동김씨 대종택인 양소당, 비안공 김삼근 선생의 고택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조들의 거처가 유서 깊은 집안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줄 법하다.

 

특별히 구 안동(상락)김씨 종택인 삼소재(三素齋)는 5대손인 김종락 선생의 호다. 호는 주로 그 사람을 대변한다. 삼소재는 세 가지 즉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검소한 음식을 먹고, 깨끗한 행실을 추구하는 것에 치중함을 말한다. 호의호식과 부와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위 삼소재 뜻에 의아함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세속적인 인간으로서 많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는 없지만 그런 뜻을 품고 살았다는 것은 후대인에게 언제까지나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리라.

 

소산마을 앞에는 풍산 들(풍산 평야)이 펼쳐져 있다. 2012년 낙동강 정비 작업이자 토지개량사업의 일한으로 경지정리가 다듬어져 반듯하다. 질서정연한 농경지가 마치 두부를 잘라놓은 것 같다. 영농 기계화로 작업의 생산력을 높이게끔 해 놓은 구조다. 엄청 넓은 농경지를 보고 있노라면 안동의 곡창지대가 바로 이곳임을 생각하게 된다. 잘 닦여진 농로를 따라 농업용수 조절을 위해 자리하고 있는 풍천 배수장을 지나 병산서원으로 향했다.

 

예전에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산협의 벼룻길인 황톳길로 문명의 혜택을 느낄 수 없는 자연의 길이었다. 이리저리 패이고 울퉁불퉁해서 크고 작은 차들의 운행에 불편함을 주었다. 부득이 근래에 들어 인공적인 길이 마련되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최대한 황토색과 유사한 재질의 색으로 정비된 도로가 자연의 길인 양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병산서원 하면 먼저 서애 류성룡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일찍이 퇴계 선생은 류성룡 선생을 보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퇴계 선생의 수제자로 잘 알려진 류성룡 선생은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을 비롯하여 우의정에 이르기까지 정승으로 다양한 벼슬을 가졌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나라 안팎으로 많은 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청출어람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병산서원은 조선의 5대 서원(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소수서원, 도동서원)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원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다가 병산 앞에 옮겨오면서 병산서원이 되었다. 서원 앞에 펼쳐진 낙동강과 병산이 멋스럽다. 특별히 서원 뜨락에는 여름이면 배롱나무꽃이 장관이다. 서원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배롱나무는 백일 가까이 꽃을 피우기에 백일홍 혹은 간지럼 나무라고도 불린다. 열꽃처럼 번져가는 배롱나무꽃은 병산서원과 어우러져 한여름을 꽃의 향연으로 달군다. 한편, 꽃에 묻힌 지붕 없는 자그마한 달팽이 뒷간이 특이하다. 옛날 재래식 화장실로 일명 통시(변소)다. 정원 한쪽에 놓인 통시가 생뚱맞게 다가오지만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서원의 정문 복례문은 자신을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인(仁)의 뜻을 가졌다. 해서 문을 통과하기 전에 불현듯 의복을 가다듬고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공연히 엄숙함이 밀려들 즈음 어느새 특별한 공간으로 순간 이동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만대루는 병산서원의 백미다. 두보의 시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만하다’ 구절에서 따온 만대루는 36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규모가 위풍당당하다.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약간 휜 듯한 나무 기둥과 기둥을 받치고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초석이 자연스럽고 순박하다.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하게 살린 건물의 위용이 자연미의 극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는 자연물을 그대로 사용했기에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린다. 장대한 기둥 사이로 우후죽순 서 있는 누각이 웅장하다. 200여 명쯤 수용할 수 있는 만대루 마루의 전경 역시 일품이다. 정감 어린 자연 앞에 놓인 병풍산과 고운 은빛 모래사장을 거느린 낙동강 물결이 윤슬에 반짝여 눈이 부시다.

 

만대루에서 서성이다 작은 마당 양쪽으로 펼쳐진 동재, 서재를 기웃거린 후 입교당인 강당 마루에 앉는다. 이어 만대루 너머의 멋스러운 풍광에 하염없이 취하다 장판각과 전사청 사이에 놓인 사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전형적인 전학후묘로 이루어진 사당이다.

 

사당은 류성룡 선생의 위패와 아들 수암 류진 선생의 위패를 배향하고 있다. 신문(神門)으로 통하는 내 삼문은 정면 3칸으로 솟을 3문으로 되어있다. 사당은 언제나 특별한 공간으로 출입문에 있어 부정한 것을 막기 위해 기둥과 문이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우주의 생성과 조화의 원리를 상징하는 태극문양도 있는데 이는 천도를 상징하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존덕사(尊德祠) 입구 내삼문을 받치고 있는 기둥의 주춧돌 위 화강석의 표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주역의 팔괘(八卦) 중 사괘로 태극기의 건곤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천지 만물에 깃든 음양의 조화를 말하는 것이리라. 향사가 아니면 문을 열지 않는 존덕사 마당 좌우의 석조물인 정료대(관솔로 야간에 불을 밝히는 것) 역시 팔각형으로 주역에 나오는 팔괘를 상징한다. 이렇듯 사당을 이루고 있는 물건 하나하나에도 모두 천지의 조화와 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넘어가는 벼룻길은 인고의 길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길이 연신 발길을 잡아끈다. 세속과 떨어진 산속 오솔길은 우여곡절의 인생사처럼 굴곡지다. 때로는 앞을 가로막는 가파른 길은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길이다. 산허리를 따라 이어지는 길은 끊어질 듯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험준한 산 중심부로 나가게 한다. 평탄함을 거부하고 굽이치는 고뇌의 길은 역경을 이겨내어 인간과 조화로운 만남을 위해 놓여 있다.

 

한편, 길게 이어진 산길은 사색의 길로 인격완성으로 나가는 길인 양 다가온다. 옛날 명망 높은 류성룡 일가족을 비롯한 하회 류씨 집성촌의 선비들이 넘나들었을 벼룻길은 지금보다 더 험난했을 것이다. 수년간 피폐해진 환란의 시대에, 곳곳에 걸쳐졌던 난관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을 길이다. 선인들이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언행을 갈고 닦았을 길로 생각된다. 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았던 당파싸움과 7년의 임진왜란은 선비에게 크나큰 과업을 염두에 두고 힘차게 나아가게 했던 길이리라. 이로써 유교 문화길은 한때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넘나들었을 인고의 현장이자, 삶의 화합을 이루어나가게 하는 길이기도 했으리라.

 

‘전통이 휘감아 흐르는 유교 문화길’이란 안내판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낙동강이 한줄기 생명의 젖줄인 양 길게 이어져 있다. 휘어진 듯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듯 무언의 침묵을 지킨다. 강이 말없이 끝없는 여행을 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산협의 완만한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맑은 시가 포근한 명상에 젖게 한다. 순간 힘겨운 삶의 길 위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공동체로 함께 나아가라고 일러준다. 한 세대와 세상을 연결 짓는 길은 삶의 통로이다. 길은 만남을 위해 존재하고, 향수에 빠져들게 하며 삶의 희로애락의 그것처럼 항상 열려 있다.

 

특별히 산협에 걸린 길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염두에 두고 넘나들게 한다. 이는 도(道)와 예(禮)를 실천하는 길로 인격 수양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시간의 길 위에서 자연이 들려주는 침묵의 언어를 헤아리며 걸음은 어느새 하회마을을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이르게 한다.

 

유교 문화길 제2길 1편은 지면상 이즈음 마치고 2편은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