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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에 떨어져 구르는 것이 어찌 낙엽뿐이겠습니까, 석문정(石門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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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둘 낙엽을 떨구고 서 있는 나무들을 보면 ‘길 떠나는 수행자 같다’라는 생각이 든다. 낙동강을 따라 펼쳐져 있는 안동의 누정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고도 벌써 세 번째 맞는 가을이고 서른네 번째 답사이지만 왜 이 계절에 와서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걸까?

나무들이 신록에 덮여 있을 때는 그 푸르름에 눈이 부셔서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신록이 가을 색으로 물들어 가고 나뭇잎이 하나둘 바람에 떨어져 바람에 나부낄 때면 나는 이 생각에 더 고독해짐을 느낀다. 어쩌면 이번 답사에서 나는 그 물음에 답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번 호의 답사 장소를 석문정으로 오르는 호젓한 산길을 택한 까닭도 48년 전의 추억을 살려내기 위함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77년 여름부터 3개월 필자는 석문정에 머물렀다. 아련한 추억 속의 석문정을 다시 찾으면서 젊었던 시절의 고뇌도 돌아보고 낙엽을 떨구고 서 있는 나무처럼 길 떠나는 수행자가 되어보기에 최적의 장소일 것 같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이제 우리는 가을 앞에 섰습니다. 가을은 아무런 미련 없이 가진 것 훌훌 털어내어 버리게 하는 무상의 계절이라는 느낌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겠지요. 세월의 흐름 앞에 부여잡을 힘조차 버거워 이리저리 구르는 낙엽이 있기에 어쩌면 가을은 사람들을 시인이 되게도 하고 또 철학자가 되게도 하는 계절인가 봅니다. 오늘 내가 옛 그리움을 들추어가며 오르는 호젓한 산길에 떨어져 구르는 것이 어찌 낙엽뿐이겠습니까.

석문정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청성산 중턱
전망 좋은 곳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경상북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1985. 8. 5)

석문정사는 1587년(선조 20)에 학봉(鶴峯) 김성일(金誠一, 1538~1593)이 지은 정자이다.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청성산 중턱 전망 좋은 곳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김성일은 자연경관이 뛰어난 이곳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경치 좋은 곳에서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정자와 정사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석문정’과 ‘석문정사’란 현판이 각기 대청 내부와 바깥쪽 도리에 걸려 있다. 당호는 건물 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 바위 둘이 마치 석문처럼 보이는 데서 비롯되었다. 정사는 건물 자리와 사방으로 거닐 수 있을 정도만큼만 고른 좁은 대지에 ‘ㄴ’자형으로 앉혔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은 4칸의 정자이다. 낙동강 쪽으로 시야가 트여 있는 정면 좌·우측에 각기 2칸 온돌방과 4칸 대청을 배열하고 이 온돌방 뒤편에 돌출된 온돌방 1칸을 더 두었다.

대원정사를 지나 석문정으로 오르면 바위면에 ‘석문’이라 큰 글씨로
새긴 바위를 지나면 석문정사를 마주한다.
석문이란 글씨는 석문정사를 중수하는데 큰 역할을 한 학봉의
5대손 김성월(1659~1745)의 글씨이다.

송암 권호문과의 교유와 인연

학봉 김성일은 1568년 청성산에서 송암 권호문과 공부했다. 송암은 이미 2년 전인 1566년 석문정 아래에 연어헌을 짓고 청성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때 학봉은 송암에게 “올해(1568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함께 청성산의 주인이나 되자.”라고 하였다. 그해에 학봉은 급제하고 낙방한 송암은 청성산에 은거하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1585년) 어느 날 학봉은 송암에게 “청성산의 절반을 기꺼이 저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보냈고, 송암은 흔쾌히 청성산의 반을 잘라서 학봉에게 주었다고 한다. 1586년 겨울, 학봉은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청성산의 절반을 송암으로부터 받은 학봉은 1587년 연어헌 위쪽 가파른 절벽 위에 학문을 닦고 강학을 할 장소로 자신의 정자인 석문정사를 세웠다. 3월에 석문정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7월에 송암이 세상을 떠났고, 8월에 석문정사가 완공되었다.

학봉 김성일 연보에 “정자의 서쪽에 돌 2개가 마주 바라보며 서 있는데, 골짜기가 휑하니 뚫려 마치 모양새가 문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석문이라 하였다. 방은 하나로 환하게 밝았으며, 도서가 시렁에 가득하였다. 그 안에 단정히 앉아 있으면 처음에 먹은 마음과 부합되어 기뻤는데, 사색하여 수양하는 공부가 이때에 이르러 더욱 충실해졌다. 나중에는 비록 임금이 부르는 명에 못이겨 억지로 나아가 벼슬했으나 조정에 오래 있었던 것은 선생의 뜻이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동편에서 바라본 석문정. 김성일은 자연경관이 뛰어난 이곳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선생은 청성산과 석문정에 머무는 것을 가장 행복하게 느낀듯하다. 학봉은 청성산을 여러 차례 답사하면서 몇 편의 글을 남겼다. 어느 날 정사를 지을 터를 닦으면서 감회를 글로 남기고 자기 뜻을 간접적으로 피력했다. 『학봉집(鶴峯集)』에 실린 글을 옮기면,

가파른 길은 구름 밖에 비껴 있고 / 鳥道橫雲表
중암에는 기도 있고 당도 있구나 / 中巖有紀堂
천 길 깊은 강물은 거울 같고 / 千尋江作鏡
만 길 높이 솟은 옥은 언덕 되었네 / 萬仞玉爲岡
내 어찌 여산사를 얽으려 하리 / 肯結廬山社
유독히도 이씨산방 좋아서라네 / 偏憐李氏房
서대에서 맑은 달을 희롱한다면 / 西臺弄明月
남은 그 빛 이어받을 수도 있으리 / 倘可襲餘光

이 시를 보면 학봉이 정사를 지으려는 뜻이 잘 담겨 있다. 여산사는 백련사를 가리킨다. 중국 진(晋)나라 때 혜원이 여산의 동림사에서 18명의 학승과 더불어 공부하면서 백련사라고 하였다. 또 ‘이씨산방’은 송나라 때 이상이 여산의 백석승사에 만 권의 장서를 쌓아놓고 ‘이씨산방’이라 한 것에서 의미를 취했다. 이 시를 통해 학봉이 학문을 닦고 교육할 목적으로 석문정사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또 송암이 물려준 터에 석문정을 짓고 함께 공부하고 유연자적 지내고자 했지만, 완공을 한 달 앞두고, 송암이 세상을 떠나버리자 안타까운 마음을 적은 시도 볼 수 있다.

내가 이미 늙고 송암 이미 죽었으니 / 鶴峯已老松巖去
두 늙은이 함께 술잔 기울일 길이 없네 / 兩老無緣共把杯
머리 돌려 옛날 놀던 산양을 바라보다 / 回首山陽感舊處
들판에서 젓대 울어 홀로 대에 오르네 / 平蕪一篴獨登臺

석문정 내부 2칸 통 방과 1칸 방이 문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져 있다.
마루 쪽으로는 분합문을 내고 3면에는 쌍여닫이 띠살문을 두어 방 안이 밝고 명랑하다.

학봉은 벼슬에서 물러나 청성산에 머무르다가 1588년 7월에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가 그를 가만히 고향에 머물러 있게 두지 않았다.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석문정에서 지내던 하루하루를 그리워하며 반드시 돌아갈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기도 했다. 선생은 1590년 3월 통신사의 부사로 명을 받고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떠나야 하는 여정이라 가는 길에 고향에 잠시 들렀다. 이 소식을 들은 해월헌(海月軒) 황여일(黃汝一)이 3월 19일에 석문정사로 선생을 뵈러 왔다. 이날 지은 시를 보면,

석문에 내가 지은 정사 있는데 / 石門我精舍
집 지은 뒤 봄이 몇 번 지나갔던가 / 結構經幾春
거기에서 하루도 못 머물러 보고 / 未能一日居
문득 창해 나루 찾아가게 되었네 / 卻問滄海津
이번 길에 산 밑으로 내 지나옴에 / 今來過山下
원숭이와 학이 모두 성을 내누나 / 猿鶴皆生嗔
북산이문 같은 거야 비록 없지만 / 雖無北山移
주언륜과 같이 된 게 내 부끄럽네 / 自愧周彦倫
나라 일이 중한 것만 생각하노니 / 但念王事重
내가 어찌 잠시나마 머뭇거리랴 / 我何小逡巡
내 마땅히 충성과 믿음에 의탁을 하여 / 會當仗忠信
한번 가서 양국 우호 이룩하리라 / 一成兩國親
세 변경에 딱딱이의 소리 끊기고 / 三邊絶勺斗
임금 은택 백성에게 흡족케 하리 / 聖澤洽吾民
그런 뒤에 고향에 돌아와서는 / 然後賦歸來
길이 길이 산속 사는 사람 되련다. / 永作山中人

이 시는 학봉은 벼슬길을 마다하고 석문정사에서 수양과 강학을 하며 지내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국가의 일로 멀리 원행을 떠나는 심경과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양국의 우호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절절히 담겨 있다. 그러나 통신사로 가면서 조선과 일본 양국의 우호를 이룩하여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고 난 후 귀향하여 석문정사에서 학문과 강학을 하며 보내고자 한 뜻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곧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학봉은 전쟁 중에 전장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학봉은 그 뒤로 석문정사에 오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경상북도 유형유산으로 지정된 막곡동 삼층석탑이다.
자연석 위에 2층 기단, 3층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높이 1.7m이다. 영가지에 석문정 동편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산사 절터라고 알려져 있다.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조성한 산천비보탑이다.

석문정사의 주변 경관은 밀암(密菴) 이재(李栽, 1657∼1730)가 쓴 「석문정사중수기石門精舍重修記」에 잘 드러나 있다.
"천등산 한 자락이 수십 리를 내려와서 낙동강 강가에 이르러 우뚝하니 솟아나 청성산이 되었는데, 정사는 산의 3분의 2쯤 되는 높이에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 물이 동남쪽에서 흘러와 북쪽을 향해 흐르면서 곧장 이 산 아래에 이르렀다가 다시 서쪽으로 꺾여서 산 바깥쪽을 휘돌아 나가는데 정사에서 보면 멀리 강변과 산봉우리가 기이하고도 교묘하며, 맑은 못과 긴 여울은 맑고도 깨끗하여, 마치 산은 머리를 틀어 올린 것 같고, 물은 거울을 펼쳐놓은 듯하다. 이에 그 맑은 기운과 뛰어난 전망은 동남쪽 지방 전체를 둘러보아도 아마 이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라고 찬탄하였다
지금도 석문정사 마당과 석문 주변에서 바라보면 산과 강의 풍경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그러나 도시의 팽창과 개발로 옛 정취를 즐기기에는 한계가 있다.

가파른 길은 구름 밖에 비껴 있고, 중암에는 기도 있고 당도 있구나,
석문정으로 오르는 길이 호젓하다.

정자의 주인인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으로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넷째 아들이다. 선생은 동생 김복일과 함께 도산의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辯誣)를 위해 노력했으며, 나주목사를 거쳐 관찰사에 이르렀다.
일본에 통신사로 가서는 당당하고 떳떳하게 사신의 임무를 다하였다. 이듬해 돌아와 정사 황윤길은 왜구가 반드시 침공할 것이라는 복명과는 달리 왜구가 군사를 일으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잘못 보고한 책임으로 처벌이 논의되었으나, 류성룡(柳成龍)의 변호로 화를 면하였다. 택당 이식(李植)은 『해사록(海槎錄)』 발문에서 “복명에 있어서 동행의 보고는 겁에 질려 사신의 체통을 잃었던 허물을 덮으려는 방편으로 왜구가 침공할 것이라 하였고, 학봉은 어지러워진 민심을 수습하여 국기를 튼튼히 하는 것이 더욱 다급한 사항이라 상반된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또한 조정에서도 학봉의 말을 따라 왜적에 대한 방비를 늦춘 것도 아니었으니 학봉만을 허물할 수도 없는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선생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초유사 직을 맡아 국난 극복의 선봉이 되었다.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고, 경상좌·우도 관찰사로 의병 규합과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였으며, 진주목사 김시민과 함께 진주성을 보전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 순찰사를 겸하여 각 고을의 힘을 규합하여 왜적에 항전하다가 진주공관에서 순직했다.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숙종 2년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안동 임천서원(臨川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저술로 『상례고증(喪禮考證)』『해사록』 등이 있다.

실록이 가을빛으로 조금씩 물들고 있다. 바쁘게 살다 보니 계절의 흐름도 바람결의 스침도 느낄 새 없는 삶의 연속이지만 불현듯 가슴을 파고드는 찬 기운에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가을 깊숙이 들어와 있다. 48년 전 잠시 머물렀던 옛 그리움을 들추며 답사한 석문정은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시간이요.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사람이요.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여기서 만나는 모든 것들에 기쁨과 평화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준 시간이었다.
석문정에서 동쪽 오솔길로 내려가면 송암 권호문의 정자인 연어헌으로 이어진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우거진 오솔길이다. 그 길은 소나무·참나무·산죽 등이 어울려 호젓하고 상쾌하다.

석문정사 현판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는 전경
정자에서 바라보는 전경	관리인이 머문 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