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안동, 역사를 품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미래의 벌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광감루(曠感樓)


의성에서 발화된 산불로 인해 안동, 의성, 청송, 영덕은 초토화되어 버렸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은 허탈함에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일분일초를 다투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긴박한 순간에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떨리는 가슴 가눌 길 없다.

 

광감루를 찾아가는 날, 시내는 온통 연기로 뒤덮여 있고, 메케한 냄새로 숨쉬기조차 어렵다. 광감루로 향하는 길은 평소와 달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조차 뜸했다. 광감루는 안동 관왕묘(關王廟)의 문루이다. 관왕묘는 경덕중학교 뒤편 태화산 기슭에 서악사와 이웃하며 자리 잡고 있다. 서악사와 관왕묘는 신앙의 대상은 다르지만, 서로에게 등 기대어 무심한 듯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을 머리에 이고 묵묵히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관왕묘의 문루인 광감루이다.

 

관왕묘는 중국 삼국시대 때 촉한(蜀漢)의 명장인 관우(關羽, 178~219년)를 모셔두고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관우의 자는 운장(雲長)이고 휘(諱)는 우(羽)이며 하동인으로 유비(劉備), 장비(張飛)와 함께 도원결의를 통해 의형제를 맺고 죽을 때까지 충절을 지킨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관우를 모신 묘우를 관왕묘라 한 것은 장군이 지닌 불굴의 충성심과 의리 그리고 악령을 제어하는 용맹스러운 힘을 상징하여 관우를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이후 송나라 휘종(徽宗, 1082~1135)은 그를 무안왕(武安王)으로 추존하였고, 1594년 명나라 신종(神宗, 1563~1620)은 나라와 백성을 수호하는 무신으로까지 선포함으로써 관왕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또한 관우는 초인적인 무예와 함께 높은 학식을 겸비하고 있어서 민간에서는 무운과 재운을 가져다주는 수호신으로 숭배되었고 중국의 한족에게는 영험 있는 신앙의 대상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110년 전 서악사와 관왕묘의 유리건판 사진이다.
관왕묘의 문루인 광감루가 완연하고 아래에 서악사의 모습도 잘 드러난다.
멀리 영호루의 모습도 아련하게 드러난다.
촬영은 조선총독부박물관 도리이류조(鳥居龍藏)이고,
날자는 1914년 3월 17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관왕묘는 임진란과 관련이 있다. 벌써 십여 년이 지났지만 지난 2012년은 임진란(1592년)이 일어난 지 꼭 7주갑(420년)이 되는 해였다. 7주갑이란 60간지가 7번 돌아 다시 임진년을 맞았다는 의미로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안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열렸다. 임진란은 우리 역사상 가장 가열했던 역사이지만 오랜 세월에 지워지고 묻혀버려 지금은 그날의 아픔과 역사의 생채기를 찾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임진란의 영향으로 생겨난 관왕묘는 서울에 두 곳(남관왕묘, 동관왕묘)과 지방에는 강진·안동·성주·남원 등 네 곳에 세워졌다. 그 후 영조 때에 서울에는 북묘와 서묘가 추가로 세워지고, 지방에는 전주와 하동에도 설립되어 역사의 교훈으로 남아 있다. 안동 사람이면서 안동에 이러한 임진란의 영향으로 생겨난 관왕묘가 있다는 사실조차 대부분 모르고 지낸다. 차제에 안동 관왕묘를 통해 관제 신앙과 그 의미를 새겨보고자 한다.

 

문루를 지키고 있는 인왕상(좌)
문루를 지키고 있는 인왕상(우)

 

안동의 관왕묘는 서악사가 있는 태화산 남쪽 기슭인 송골굼에 있다. 송골굼이란 골짜기 안쪽은 넓으나 입구는 송곳 구멍처럼 좁다고 붙여진 지명으로 예부터 호두혈(虎頭穴)로 불릴 만큼 호환이 잦은 곳이었는데 관왕묘를 옮겨 온 후부터는 호환이 사라졌다고 전한다. 태화산의 능선을 따라 남향으로 자리 잡은 관왕묘는 동쪽으로는 안동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에는 낙동강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어 이곳에서 바라다보는 전망도 아름다워 안동 8경 중 제3경인 ‘서악만종(西岳晩鍾)’이 바로 이곳이다. 관왕묘는 무안왕묘(武安王廟), 묘우삼문(廟宇三門), 동·서재, 광감루로 구성되었으며 경상북도 민속자료 30호로 지정(1982년 2월)되었다.

 

안동에 세운 관왕묘는 선조 31년(1598)으로 명나라의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목성산(木城山) 기슭에 건립하였다. 향토지인 영가지에 보면 “선조 31년 설호신이 창설했다. 본래는 성의 서문(西門) 안에 있었는데 북쪽 기슭이 영내(營內)에 있는 것을 향인(鄕人)이 문묘와 대치되어 있음을 꺼려하여 조정에 통의하여 서악의 동대(東臺)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가지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듯이 안동 관왕묘는 목성동 천주교회가 자리 잡은 목성산 기슭에 건립되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은 선조 39년(1606)이라는 설과 인조 14년(1636)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초창기에는 대문이나 담장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고 향화(香火)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숙종 때에 와서야 비로소 나라에서 매년 춘추로 향과 축을 보내오고 진장(鎭將)이 장교를 거느리고 제사를 보살피게 하였다.

 

관우를 모신 무안왕묘

 

관왕묘 영역으로 들어가 보자. 공간 배치는 사당 건축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맨 위쪽에는 참배공간인 묘(무안왕묘)를 두고 아래에는 낮은 지형에 맞추어서 비대칭의 동․서재를 배치하고, 제일 아래쪽에 문루인 광감루를 두고 있다. 광감루는 길에서 태화산 능선을 타고 오르는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 편리하게 낸 계단으로 오른다. 계단 위에는 높이 1.2m, 너비 0.6m, 두께 0.2m 정도인 화강암에 양각된 인왕상이 눈을 부릅뜨고 버티고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한 2층 누각 건물이다. 맨 앞쪽에 있는 4개의 기둥은 80cm 정도 높이의 팔각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각형의 나무 기둥을 세워서 변화를 주고 있다. 문루에서 바라다보는 정경은 탁 트여 있어서 시원하다. 이곳에서는 낙동강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고 영남 3대 누각의 하나인 영호루도 강 건너로 옮겨지기 전에는 아주 가까이에 있어 이곳을 지나는 시인 묵객들의 발길도 잦았다. 광감루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서향하고 있는 설상대(雪上臺)가 관리사와 마주 보고 있다. 두 건물 사이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굽은 계단이 있고 이 계단을 오르면 무안왕묘라는 현판이 달린 솟을대문과 그 안쪽에 묘우인 관왕묘가 자리 잡았다.

 

묘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전면은 칸살이 넓고 측면은 좁게 설계되었다. 묘우는 사방이 돌담으로 둘러싸여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었다. 지붕의 형식은 겹처마에 풍판이 달린 맞배지붕 집이다. 벽체는 서․북․동 3면은 막돌을 섞은 흙벽으로 처리했고 그 위에 기와로 멋을 낸 구조로 두텁게 처리하여 산 능선에 터 잡음으로서 비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보완했다. 전면 3칸은 세살문으로 된 들어 사분합 문을 설치하여 전체를 열었을 때 묘우 내부까지 자연채광이 되도록 설계했다. 이 부분은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어칸에는 머룸 중방을 놓고 그 위에 세살문을 달아 가운데 문턱을 훌쩍 높여서 출입할 수 없도록 설계했다. 대신 좌우 협칸에는 머름을 두지 않고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이 문을 통해 묘우 내부로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어칸으로 출입할 수 없도록 한 것은 장군과 직접적인 첫 대면을 누구와도 허락하지 않고자 하는 의도와 절대 권력자의 권위를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천정은 우물천장으로 마감했고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광감루에서 내려다보는 영호루의 옛 모습이다.
촬영은 조선총독부박물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이고,
날자는 1914년 3월 17일로 기록하고 있다.

 

태화산 기슭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리 잡은 서악사나 관왕묘는 모두 신앙의 한 형태이다. 불교는 우리나라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대표적인 종교이고, 관왕신앙은 임란 후 국가적인 지원을 받으며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받았고, 어쩌면 관우를 ‘전쟁의 신’으로 볼 수 있다. 전쟁터에서 다친 사람들은 자신들의 빠른 쾌유와 회복을 기원했으며, 장수들은 자신의 휘하 병사들이 전쟁에서 싸워 이기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을 것이다. 관운장을 숭배함으로써 군사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든지, 관운장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으니, 승리는 우리 것이라고 하는 ‘사기 진작’ 차원에서도 숭배했을 것이다. 또한 관우는 무사 출신이면서도 춘추를 읽을 정도로 뛰어난 문인이었다고도 알려져 문무를 겸비한 유일한 성인으로까지 받들어진다. 따라서 관우는 시험을 앞 두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빌면 시험을 통과시켜 주고 액운을 없애며 병과 재해를 없애준다고 믿고 있다. 이처럼 맹장이며 지장인 관우의 상징성으로 인해 관우 신을 찾는 이유도 다양하지만, 재물과 관련된 경우도 많다. ‘전쟁의 신’인 관우가 왜 재물신으로도 모셔지는 것일까? 관우의 고향인 해주는 중국 최대의 소금호수 해지(解池)가 펼쳐져 있다. 중국 소금 생산의 70%를 생산할 정도로 해주는 예부터 유명한 소금 생산지였다. 그러므로 산서성의 소금 장수들은 장사를 하며 관우를 신으로 모셨는데, 이들을 통해 관우가 재물신으로도 널리 알려진 것 같다. 관왕묘에서 받드는 제사는 2월 보름과 관우의 출생일인 5월 13일 1년에 두 차례 올린다.

 

관우상 / 광감루

 

이처럼 중국의 장수인 관우를 제사 지내고 그를 모신 관왕묘가 사백 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왕묘와 관제신앙은 자연스럽게 유입된 종교가 아니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외세를 빌려 막아내게 된 약소국가의 아픔이기도 하며, 자주권을 상실해 버린 국가가 강대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비애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관제신앙은 마음에서 우러난 신앙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고 현실적 필요에 의해 수용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시대에 따라서 종교의 부침이 심했던 우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변함없는 존경과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안동의 경우에는 이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국가적인 지원 아래 설립된 관왕묘이지만 안동에서는 유림에 의해 철저하게 배척되었던 것 같다. 영가지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동 사람들은 안동향교의 문묘와 마주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관왕묘를 태화산 기슭으로 옮길 정도로 당시 관왕묘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가 철수하자 더욱 이를 방치해버렸다. 그러나 관우가 신으로 이 땅에 모셔지고 그 명맥이 끊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유교적 덕목이라고 여겼던 충과 의를 바로 관우에게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릇 세상에는 끊임없이 변할 때 더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변하지 않아서 더 좋은 것도 많다. 선인들의 자취가 서린 문화유적은 오랜 풍상에도 변치 않았을 적에 더 큰 감동을 준다. 더욱이 그 유적을 둘러싼 자연조차도 옛 모습 그대로라면 감동은 더욱 커진다. 관왕묘와 광감루를 답사하며 다시 한번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미래의 벌판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임란 이후 433년이 지난 오늘에도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우리는 세상사 한갓 부질없다고 하면서도 백 년도 못사는 세상을 천년을 살 것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비운다는 것,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삿된 욕심마저 버리고 하늘의 순리를 쫓으며 사는 삶. 퇴계는 이를 ‘알인욕(遏人慾)하고 존천리(存天理)하라’고 했다. 인간의 삿된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순리를 따르라는 가르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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